“죽이는 쪽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감시하던 일본 간수가 오히려 이 사형수를 존경하게 됩니다. 적국의 간수가 사형수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 안중근이 감옥에서 쓴 글의 비밀을 만평한국사에서 풀어봅니다.
이 글 하단에는 퀴즈 정답과 심화퀴즈, 그리고 지난 편 심화퀴즈 정답이 있습니다.
안중근, 하얼빈에서 총을 쏘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 무인 집안의 맏아들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서양 근대 문물을 함께 접했습니다.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명 토마스를 받았고,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교 설립과 계몽 운동에 힘썼습니다.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은 의병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1909년 3월에는 동지 12명과 왼손 약지를 잘라 피로 대한독립을 맹세하는 단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와 동지들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의 제거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하얼빈역 플랫폼.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마치고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안중근은 브라우닝 권총 7발을 발사했습니다. 3발이 이토에 명중했고, 이토는 열차 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체포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안중근은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밝혔습니다. 자객이 아니라 독립군의 장수로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이토의 죄목 15개조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당당히 심문에 응했습니다.
뤼순 감옥에서 붓을 들다
뤼순 감옥으로 이송된 안중근은 6회의 공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형 선고 후 오히려 두 권의 저서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는 자서전 안응칠역사였고, 다른 하나는 동양평화론이었습니다. 동양평화론에서 그는 한국, 일본, 청 3국이 공동 기구를 설립하고 통일 화폐를 사용하며 연합군을 창설해 서양 열강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을 맡은 판사 히라이시는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을 미루려 했으나, 도쿄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변호를 맡은 일본인 변호사 미즈노도 그의 답변에 감복했다고 전해집니다.
안중근을 감시하던 간수 지바 도시치는 사형수의 의연한 태도와 글씨에 깊이 감복했습니다. 의사는 지바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직접 써서 건넸습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갔습니다. 향년 32세였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면회 온 두 동생을 통해 사형 판결을 받거든 다른 마음먹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간수 지바 도시치는 순국 후 자진 제대했습니다. 그는 받은 유묵을 죽을 때까지 모셨고, 현재 일본 미야기현 대림사에는 의사와 지바의 위패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습니다.
만평한국사 영상으로 보기
만평한국사 제53편 — 사형수의 붓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미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단순한 암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밝혔고, 이토의 15개조 죄목을 열거하며 국제법적 전투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국주의 열강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가 살아 있음을 알린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유묵과 동양평화론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를 넘어 동아시아 평화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의사는 한·중·일 3국 공동 평화 기구와 통일 화폐를 제안했는데, 이는 오늘날 EU와 유사한 구상이었습니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으나, 그 사상적 가치는 현재까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리역사넷 안중근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평 해설 — 사형수의 붓

이번 만평에는 두 가지 연출 장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 크기 대비입니다. 의사는 화면 중앙에 크게, 간수 지바 도시치는 철창 너머에 작게 배치했습니다.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물리적으로는 간수가 권력자이지만, 인격의 크기는 역전되어 있다는 것을 구도로 표현한 것입니다.
둘째, 약지가 잘린 왼손입니다. 안중근의 왼손 약지는 단지동맹 때 잘린 것으로, 이 손으로 한지를 누르며 붓글씨를 쓰는 장면은 그의 각오와 신념을 상징합니다. 목숨을 건 맹세를 한 그 손이 감옥에서 평화를 논하는 글을 쓰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이 만평의 핵심입니다.
현대 통찰 — 적에게도 인정받는 인격
감옥 벽을 넘은 존경
안중근과 간수 지바 도시치의 관계는 역사에서 드문 장면입니다. 이토를 사살한 적국의 사형수를, 그 적국의 헌병이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지바는 순국 후 자진 제대했고, 유묵을 평생 모시며 불교 사찰에 위패를 세웠습니다. 일본 우익들의 비판과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그 존경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이 관계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 적국의 간수에게도 글씨를 써주는 품격, 자신을 죽이려는 나라를 위해서도 평화를 논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지바가 존경한 것은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한 인간의 전체였습니다.
만델라와 교도관들
비슷한 구조가 20세기 후반에도 나타났습니다. 1994년,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취임식에 자신을 감시하던 교도관들을 귀빈으로 초청했습니다.
만델라는 감옥에서도 간수들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고, 아프리칸스어를 배워 그들과 대화했으며, 출소 후에도 교도관 크리스토 브란트와 평생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브란트는 만델라를 감시하던 시절을 회고하며, 감옥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수감자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둘 다 적의 감옥에 갇혔고, 둘 다 간수의 존경을 받았으며, 둘 다 자신을 가둔 체제를 향해서도 평화와 화해를 말했습니다. 가둔 쪽이 갇힌 쪽에게 감복하는 역전은 인격이 물리적 권력을 넘어서는 순간에만 가능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도 있습니다. 만델라는 출소 후 화해의 결과를 직접 만들어냈지만, 하얼빈 의거의 주인공은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남았고, 유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적국의 헌병이 평생 유묵을 모시고 위패를 세운 것은, 인격의 무게가 국경과 시간을 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구조는 반복됩니다. 조직에서 밀려난 리더를 경쟁사 직원이 존경하는 일, 해고된 창업자의 철학을 후임 경영진이 결국 따르게 되는 일은 뉴스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위가 사라진 뒤에야 진짜 무게가 드러나는 것, 그것이 인격의 힘입니다.
“죽이는 쪽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퀴즈 정답 · 심화퀴즈 · 마무리
퀴즈 정답: ③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쓰고 글씨를 남겨서
사형 선고 후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고,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직접 써서 건넸습니다. 지바는 사형 집행 후 자진 제대했고, 그 유묵을 죽을 때까지 모시며 위패를 세웠습니다.
❓ 심화퀴즈 — 이것 맞히면 역사 고수!
정답은 이 글 맨 아래 ▼ 클릭해서 정답 보기에 있습니다.
안중근이 사형 집행 직전 한복으로 갈아입은 이유는?
① 뤼순 감옥의 규정상 사형수는 본국 복장을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②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일본이 요구한 교수형이 아닌 군인의 죽음을 원했기 때문에
③ 가족이 면회 때 가져온 양복이 맞지 않아 한복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 지난 편 (제52편 황진이) 심화퀴즈 정답
정답: ② 실존 양반 벽계수와 푸른 시냇물 — 인물과 자연의 이중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황진이의 시조에서 벽계수는 실존 인물인 양반 벽계수와 푸른 시냇물을 동시에 가리키는 중의적 표현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신분이 가장 자유로웠다”
📢 다음 편 예고 — 제54편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이긴 유일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장비도 병력도 열세였던 독립군은 어떻게 승리했을까요? 봉오동과 청산리, 그 전투의 진실을 만평한국사에서 확인하세요.
만평한국사는 매주 한 편의 역사를 김홍도 풍 만평으로 풀어냅니다. 의사가 꿈꾼 동양의 평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쇼츠 구독과 블로그 즐겨찾기를 눌러주시면 다음 편을 놓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 더 많은 만평한국사 이야기:
▼ 심화퀴즈 정답 보기 (클릭)
심화퀴즈 정답: ②
의사는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선언했고, 일본이 내린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을 요구했습니다. 한복으로 갈아입은 것은 대한제국 군인이자 대한인으로서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감옥 규정에 본국 복장 착용 조항은 없었고, 가족이 양복을 가져온 기록도 없습니다.
“죽이는 쪽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중근 #이토히로부미 #하얼빈의거 #동양평화론 #지바도시치 #뤼순감옥 #위국헌신 #독립운동 #한국사퀴즈 #만평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