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포기한 전쟁을 군대가 이어갔다.”
삼별초 항쟁은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한 뒤에도 군대가 독자적으로 3년간 싸운 사건입니다. 1270년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는 왕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진도와 제주도에서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삼별초 항쟁의 배경부터 최후까지, 그리고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국서의 비밀을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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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항쟁의 배경 — 고려는 왜 항복했나
삼별초 항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고려와 몽골의 30년 전쟁을 알아야 합니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이 시작된 이후, 고려 조정은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며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삼별초는 이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조직인 야별초에서 출발했습니다. 야별초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구성된 신의군이 합류하면서 삼별초라는 이름이 완성되었습니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린 경별초로도 불렸습니다.
1258년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 원종은 몽골과의 화친을 결정합니다. 1270년 원종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선포하고 삼별초에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삼별초 입장에서 개경 환도는 곧 자신들의 해체를 의미했습니다. 30년간 몽골과 피를 흘리며 싸운 부대가 항복한 조정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삼별초 항쟁의 전개 — 진도에서 제주까지
1270년, 삼별초 지휘관 배중손과 야별초 지유 노영희는 항쟁을 결의합니다. 배중손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독자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강화도의 국고와 병기고를 접수한 뒤, 천여 척의 배에 군사와 백성을 태우고 진도로 남하했습니다.
삼별초는 진도 용장산성에 거점을 마련하고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자처했습니다.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며 세력을 넓혔고, 1271년에는 일본에 국서를 보내 몽골에 대한 공동 항전을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전달된 삼별초의 국서는 이전 고려 조정의 국서와 정반대 내용이어서 일본 관리들이 의아해했다고 고려첩장불심조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71년 음력 5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홍다구의 몽골군이 여몽연합군을 결성해 진도를 공격합니다. 벽파진 전투에서 삼별초는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좌군과 우군의 기습으로 용장산성이 함락됩니다. 배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 왕온도 피살됩니다.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이동합니다. 항파두리성을 쌓고 2년간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1273년 여몽연합군 약 1만 명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삼별초 항쟁은 최후를 맞습니다. 항파두리성을 탈출한 70여 명의 삼별초 병사들은 붉은오름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원 전사했습니다.
삼별초 항쟁의 역사적 의미
삼별초 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중적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별초 항쟁은 고려 무인들의 자주적 대몽항전 의식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삼별초가 독자 정부를 수립하고 일본에 외교문서까지 보낸 점은 단순한 군사 반란을 넘어선 정치적 행동이었습니다.
반면 삼별초가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던 점, 제주도에서 백성을 강제 동원한 기록 등은 삼별초의 항쟁이 순수한 항몽 운동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역사넷은 삼별초 항쟁이 고려 무인들의 항쟁 의식과 정권 유지 욕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라고 기술합니다.
만평 해설 — 김홍도 풍으로 읽는 삼별초 항쟁

삼별초 항쟁 만평에서 첫 번째 연출 장치는 배중손이 들고 있는 꺾인 고려 깃발입니다. 삼별초 항쟁의 깃발이 꺾여 있다는 것은 고려 조정의 항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깃발을 든 사람은 여전히 서 있습니다. 나라는 무릎을 꿇었지만 군인은 꿇지 않았다는 아이러니가 이 한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 연출 장치는 화면 왼쪽 관리의 표정입니다. 삼별초 항쟁에서 환도 명령을 전달하는 문신 관리가 입을 벌리고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표정은 명령이 거부당하는 순간의 충격을 보여줍니다. 명령을 내린 쪽이 오히려 당황하는 역전된 권력 관계가 삼별초 항쟁의 본질입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본사가 사업 철수를 결정했는데, 현장에서 “이건 아닙니다”라고 느꼈던 적 있으신가요? 회의실에서 내려진 결정과 실제 현장의 판단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셨나요? 삼별초 항쟁은 바로 그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삼별초 항쟁을 현대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고려 조정은 경영진, 삼별초는 현장 부서입니다. 경영진이 “전쟁을 접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은 30년간 최전선에서 싸운 조직이었습니다. 해산 명령은 곧 존재의 소멸이었습니다. 삼별초 항쟁에서 배중손은 “안 갑니다”라고 말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삼별초 항쟁과 닮은 현대의 내부고발
2019년 보잉 737 MAX 기종이 두 차례 추락해 346명이 사망했습니다. 보잉 본사는 사고 원인인 MCAS 소프트웨어 결함을 축소하고 항공기 운항을 재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보잉의 현장 엔지니어 에드워드 피어슨은 회사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피어슨은 사우스캐롤라이나 공장의 품질 관리 문제를 FAA(미국 연방항공청)에 직접 보고했습니다. 회사가 접으려 한 문제 제기를, 현장이 이어간 것입니다. 피어슨의 내부고발은 미 의회 청문회로 이어졌고, 보잉의 조직적 은폐 구조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조직의 결정과 현장의 양심 사이에서
삼별초 항쟁에서 배중손이 나라의 명령을 거부한 것과 피어슨이 회사의 축소 방침을 거부한 것은 같은 구조입니다. 조직의 공식 결정이 현장의 경험과 양심에 어긋날 때, 현장은 복종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삼별초 항쟁은 750년 전의 사건이지만, 이 질문은 오늘도 매일 직장에서 반복됩니다. 삼별초 항쟁의 결말은 전멸이었고, 피어슨의 결말은 내부고발자 보호법의 적용이었습니다. 결과는 달랐지만, 선택의 순간에 놓인 무게는 같았습니다.
당신의 조직이 포기한 일을, 당신은 이어간 적이 있으신가요? 그 선택의 끝에서 당신은 무엇을 얻으셨나요? “나라가 포기한 전쟁을 군대가 이어갔다.”
✅ 삼별초 항쟁 퀴즈 정답: ② 일본에 함께 싸우자고 국서를 보냈다
삼별초는 진도에 독자 정부를 세운 뒤, 1271년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국서를 보내 몽골에 대한 공동 항전을 요청했습니다. 삼별초 항쟁에서 발송한 국서는 이전 고려 조정의 국서(몽골 찬양)와 정반대 내용이어서 일본 관리들이 의아해했다고 고려첩장불심조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별초의 진도 정부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외교까지 수행한 독자 정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삼별초 항쟁 심화 퀴즈 — 맞히면 역사 고수!
정답은 이 글 맨 아래에 있습니다. 스크롤 전에 먼저 생각해보세요!
삼별초 항쟁 심화 퀴즈. 삼별초 항쟁이 진압된 뒤, 몽골(원)이 제주도에 설치한 기관의 이름과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탐라총관부 — 삼별초 잔당 색출과 제주도 직접 지배를 위해
② 탐라총관부 — 일본 원정(원구)을 위한 전진 기지와 목마장 확보를 위해
③ 동녕부 — 삼별초가 일본과 연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해상 감시를 위해
정답은 맨 아래 ▼클릭 정답보기에서 확인하세요!
📝 지난 편(제42편 위화도 회군) 심화퀴즈 정답
정답: ② 이성계와 대립하여 우왕 복위 시도 → 유배.
조민수는 회군에 동참했지만 이후 우왕 복위를 시도하며 이성계와 대립, 유배되었습니다.
“명령을 거부한 자가 나라를 세웠다.”
📺 다음 편 예고 — 제44편: 동학농민운동
관리가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백성이 봉기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한 일은 외국 군대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나라를 뒤집은 날, 다음 만평한국사가 김홍도 풍으로 풀어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만평한국사
삼별초 항쟁과 함께 읽으면 고려·조선의 큰 흐름이 보입니다.
제8편: 권문세족 토지 겸병 — 서류 한 장으로 사라진 고려의 땅, 삼별초가 싸운 나라의 민낯
제11편: 무신정변 — 삼별초의 뿌리, 무신정권은 어떻게 시작됐나
제5편: 삼전도 굴욕 — 고려가 몽골에 무릎 꿇은 것처럼, 조선은 청에 무릎 꿇었다
제28편: 고려 금속활자 — 삼별초가 지킨 고려, 그 나라의 가장 위대한 발명
제42편: 위화도 회군 — 삼별초처럼 명령을 거부한 또 한 명의 장군, 이성계
▼ 삼별초 심화 퀴즈 정답 보기 (클릭)
삼별초 항쟁 심화 퀴즈 정답: ② 탐라총관부 — 일본 원정(원구)을 위한 전진 기지와 목마장 확보를 위해
삼별초 항쟁이 진압된 1273년 이후, 몽골(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습니다. 주된 목적은 삼별초 잔당 색출이 아니라, 일본 원정의 전진 기지 확보와 군마 사육을 위한 목마장 운영이었습니다. 삼별초 항쟁 진압 자체보다 몽골의 일본 침공 계획이 제주도 직접 지배의 핵심 동기였습니다. 동녕부는 서경(평양)에 설치된 기관으로 제주도와 무관합니다.
“나라가 포기한 전쟁을 군대가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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