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위에 사람 없다 — 1923년
조선형평사 창립, 1923년 4월, 진주
혹시 쇼츠에서 퀴즈 못 맞히셨나요? 정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크롤하지 말고 먼저 생각해보세요.
1923년 4월, 경남 진주. 나라를 빼앗긴 지 13년째인 조선에서 인권 선언이 나왔습니다. 주인공은 독립운동가도, 양반도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간 가장 천대받아온 백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에 가장 광범위하고 폭력적으로 반대한 세력이 누구였는지, 그 사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카롭게 찌르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형평운동이란 무엇인가
백정은 조선 시대 소와 돼지를 도축하는 직업인이었습니다. 법적으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됐지만, 그것은 서류 위의 이야기였습니다. 30년이 지나도록 백정 자녀는 학교 입학을 거부당했고, 호적에는 따로 표시가 붙었으며, 일반인에게 반말을 강요받았습니다. 갓은 여전히 쓸 수 없었습니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시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23년 4월,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신현수, 강상호 등이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를 창립했습니다. 백정 출신과 비백정 인사가 함께한 연대였습니다. 창립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 조선형평사 창립 취지문, 1923년 4월, 진주
형평(衡平)의 衡은 저울입니다. 무게를 달아 균형을 잡는 도구입니다. 단순한 평화를 원한 것이 아니라, 저울처럼 정확하게 같은 인간으로 대우받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름 선택 자체가 이미 선언이었습니다.
갓 하나가 선언이었다
형평운동에서 갓은 단순한 모자가 아니었습니다. 갑오개혁보다 훨씬 전인 1894년, 동학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도 이런 항목이 있었습니다.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 동학 농민군 폐정개혁안, 1894년
수십 년 전부터 갓 하나가 인간 대우의 기준선이었습니다. 형평운동의 백정들이 그 갓을 직접 머리에 올린 것은 요구가 아니라 선언이었습니다. 이번 만평에서 중심 인물이 갓을 쓰고 서 있는 장면이 바로 이 선언의 시각적 표현입니다.
형평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창립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본사 1곳, 지사 12곳, 분사 67곳, 총 80개 조직체가 전국에 생겨났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채로, 가장 천대받던 이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인권을 요구한 것입니다.
누가 반대했는가 — 가장 충격적인 진실
형평운동의 가장 역설적인 부분은 반대 세력에서 드러납니다. 조선총독부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총독부는 형평운동이 반일 색채를 띠지 않는다고 판단해 초기에는 비교적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조선인 내부 갈등을 방치하는 편이 식민 통치에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부 민족운동 계열도 “지금은 독립이 먼저”라며 거리를 뒀습니다. 인권 운동과 독립 운동이 항상 같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광범위하고 폭력적으로 반발한 것은 조선 민중 내부의 반형평 세력, 특히 상민층이었습니다. 이들은 반형평운동을 조직했습니다. 백정 자녀의 학교 등교를 집단으로 막았고, 1925년 경북 예천에서는 반형평 세력이 형평사 지부를 직접 습격하는 폭력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차별의 언어가 조직적 폭력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보다 아래에 있던 이가 우리와 같아지면, 우리가 제일 낮아진다.”
자신도 일제의 지배 아래 차별받는 처지이면서, 더 낮다고 여겨온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차별은 위에서만 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처지의 민중 사이에서도 왔습니다.
만평한국사 제6편 영상
만평한국사 제6편 — 형평운동
만평 해설 — 그림 속 장치 2가지
이번 만평에는 두 가지 연출 장치가 있습니다. 쇼츠에서 발견하셨나요?
첫 번째 장치 — 신발의 대비. 분노한 상민의 짚신은 흙탕물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심 인물의 미투리는 같은 흙길에 서 있으면서도 깨끗합니다. 더럽혀진 것은 발이 아니라 편견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장치 — 아이의 눈빛. 군중 속 모든 어른은 분노하거나 경악하거나 회피합니다. 그런데 아이만이 온몸을 열어 중심 인물을 바라봅니다. 편견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면 어떤 어른이 될지는 어른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현대적 통찰
사회는 지금도 자꾸 더 약한 사람을 아래로 밀어냅니다. 배달 노동자, 청소 노동자, 돌봄 노동자, 이주 노동자. 우리가 그들을 부르는 방식은 1923년과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그리고 그 말투 속에 어떤 시선이 담겨 있습니까.
더 무거운 질문이 있습니다. 반형평운동을 벌인 상민들처럼, 지금 나는 내 발밑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나보다 더 낮다고 여기는 누군가를 밟아야 내 자리가 지켜진다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차별은 위에서만 오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에도, 지금도.
사람 위에 사람 없다 — 1923년
쇼츠 퀴즈 정답
❓ 퀴즈: 형평운동을 가장 거세게 막아선 세력은 누구였을까요?
① 조선총독부와 경찰
② 민족독립운동 단체와 사회주의 계열
③ 조선 민중 내부의 반형평 세력, 특히 상민층 중심
✅ 정답: ③번
형평운동에 맞서 조선 민중 내부의 반형평 세력, 특히 상민층이 조직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백정 자녀의 학교 등교를 집단으로 막았고, 1925년 경북 예천에서는 형평사 지부 습격까지 벌어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초기에 오히려 이 상황을 묵인했습니다. 일부 민족운동 계열도 독립이 우선이라며 거리를 뒀습니다.
가장 낮은 자를 막아선 건, 지배자가 아니라 이웃이었습니다.
❓ 심화 퀴즈 2문제 — 이것 맞히면 역사 고수
정답은 이 글 맨 아래 [정답 보기]를 클릭하세요. 스크롤 전에 먼저 생각해보세요!
심화 퀴즈 1.
형평사라는 이름의 ‘형평(衡平)’에서 ‘衡(형)’ 자가 원래 가리키는 뜻은 무엇일까요?
① 정의(正義) —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② 저울 — 무게를 달아 균형을 잡는 도구
③ 경계(境界) — 넘어서는 안 될 선
심화 퀴즈 2.
형평운동 기간, 일부 지역에서 백정 자녀가 공립학교에 입학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① 일제 총독부가 해당 학교를 즉시 폐쇄 명령했다
② 다른 학생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동맹 퇴학을 벌였다
③ 형평사가 자체 학교를 세워 백정 자녀를 따로 교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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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편(제5편 삼전도 굴욕) 심화 퀴즈 정답
심화 퀴즈 1 — 삼전도비는 이후 어떤 운명을 겪었을까요?
①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자진 철거해 사라졌다
② 독립 후 이승만 정부가 땅에 묻었으나 홍수로 다시 드러났다
③ 6.25전쟁 중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 정답: ②번
삼전도비는 1956년 이승만 정부 시절 민족 감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땅속에 매몰됐습니다. 그러나 1963년 한강 홍수로 다시 지상에 드러났습니다. 현재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 보존되어 있으며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땅에 묻어도, 역사는 물처럼 다시 올라왔습니다.
심화 퀴즈 2 — 김상헌이 항복 문서를 보고 한 행동은?
① 문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자결을 시도했다
② 문서를 빼앗아 불에 태웠다
③ 문서를 찢으며 통곡했고, 이후 청에 끌려가 억류됐다
✅ 정답: ③번
인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김상헌은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를 찢었습니다. 그러자 최명길은 찢긴 조각을 모아 다시 이어 붙였습니다. 찢는 사람과 잇는 사람 — 두 사람 모두 조선을 사랑했으나 방법이 달랐습니다. 김상헌은 이후 심양으로 끌려가 수년간 억류됐습니다. 일부 자료에는 “불태우려 했다”는 이설도 있으나 인조실록이 가장 널리 인용되는 1차 사료입니다.
찢어도 역사는 이어졌다
NEXT EPISODE
📺 다음 편 예고 — 제7편
조선 과거시험 커닝 백태
속옷에 경서를 빼곡히 써 넣고, 비둘기로 답을 날리고, 대리 수험생을 고용했던 조선의 수험생들. 공정한 시험일수록 더 정교한 부정행위가 나왔습니다.
“공정을 위한 시험이 불공정의 온상이 됐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만평한국사
→ 만적의 난 — 800년을 살아남은 혁명의 말 신분이 다를 게 없다고 외친 노비의 반란. 형평운동보다 730년 앞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환향녀 — 살아 돌아왔더니 쫓겨난 조선 여성들 살아서 돌아온 것이 죄가 된 사회.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논리는 형평운동과 닿아 있습니다.
→ 정조 비밀편지의 충격 진실 — 성군의 두 얼굴 겉과 속이 다른 권력의 민낯. 차별 구조를 유지한 것도 결국 권력이었습니다.
→ 세종대왕도 못 막은 조선의 야근 문화 — 강제 휴가령의 진실 600년 전에도 사람답게 살 권리를 왕이 명령해야 했습니다. 형평운동과 같은 뿌리의 질문입니다.
→ 삼전도 굴욕 — 성이 안 뚫렸는데 왕이 무릎 꿇은 이유 명분을 지키다 가장 치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인 역설. 바로 이전 편도 함께 읽어보세요.
만평한국사는 매주 김홍도 풍 만평으로 한국사를 새롭게 읽습니다. 구독과 알림 설정으로 다음 편을 놓치지 마세요. 이번 퀴즈 정답률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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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퀴즈 1 정답: ②번 — 저울
衡(형)은 저울대, 무게를 달아 균형을 잡는 도구입니다. 형평(衡平)은 “저울처럼 균등하게”라는 뜻입니다. 추상적인 정의나 평화가 아니라 계량적이고 구체적인 평등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선택 자체가 이미 선언이었습니다.
심화 퀴즈 2 정답: ②번 — 동맹 퇴학
형평운동 기간 중 일부 지역에서 백정 자녀가 공립학교에 입학하자, 다른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집단 등교 거부(동맹 퇴학)를 벌인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독부가 학교를 폐쇄한 것도, 형평사가 별도 학교를 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처지의 민중이, 아이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재생산했습니다.
편견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