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컷만평퀴즈 · 한 컷으로 읽는 역사의 아이러니
서울에 처음 전차가 달린 해는 1899년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전차를 고종이 들여온 근대화의 상징, 훗날 70년 가까이 ‘서울 시민의 발’이 된 신문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첫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몇 주 만에 서울 사람들 손에 불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른바 서울 전차 소각 사건입니다.
1899년 5월 26일,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 앞에서 전차가 어린이를 치는 사고가 났습니다.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은 전차를 막아 세우고 불을 질렀습니다. 가뭄과 치솟는 물가로 쌓여 있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정말 곱씹어 볼 장면은 불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습니다. 아이를 잃은 거리에서, 누군가는 사과 대신 조건을 내걸었거든요. 그리고 그 조건 하나 때문에 서울의 첫 전차는 두 달 반 동안 멈춰 섰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
이제 글 맨 위의 오늘의 한 컷을 다시 보세요. 축하 현수막 아래에서 첫 전차가 불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전대만 텅 비어 있고, 놋쇠 손잡이는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운전수는 어디로 갔고, 이 빈자리는 무엇을 뜻할까요?
※ 대표 만평 「1899년 5월 · 서울 첫 전차」는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현수막·말풍선·금빛 장식은 만평적 과장입니다.
30초 만평 퀴즈
그림 속 빈 운전대에 대한 답은 아래 30초 영상에 있습니다. 영상 속 보기가 나오면 잠시 멈추고 먼저 답을 골라 보세요. 정답과 해설은 영상 아래 접힌 칸에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Q. 사고 뒤, 일본인 승무원들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전차마다 누구를 태워 달라고 했을까요?
① 일본 영사관 경찰
② 대한제국 순검
③ 미국인 감독관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① 일본 영사관 경찰입니다. 서울 전차 소각 사건 뒤 일본인 종업원들은 전차마다 일본영사관 경찰관을 배치하거나 승무원에게 권총 휴대를 허락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운영을 맡은 콜브란 측이 거부하자, 일본공사관은 이를 구실로 운전수 10명과 기관사 2명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림 속 비어 있는 운전대는 사고 현장이 아니라, 책임 대신 조건을 걸며 비워 둔 자리로 다시 읽힙니다.
첫 전차는 왜 서울에 놓였나
을미사변 뒤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당시 청량리)을 자주 찾았습니다. 미국인 콜브란은 이 행차를 편하게 할 전차 노선을 건의했고,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세워졌습니다. 첫 노선은 서대문에서 종로·동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만 홍릉 행차는 건의의 배경일 뿐, 전차를 놓은 유일한 이유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기·교통 근대화에 대한 황실의 관심과 미국 측의 사업 의도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서울 전차 소각 사건: 5월 26일, 파고다공원 앞
일반 영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던 1899년 5월 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전차가 어린이를 치어 숨지게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달아나려던 전차를 막아 세우고 일본인 운전수를 끌어냈으며, 차량을 불태우고 부쉈습니다.
서울 전차 소각 사건의 분노는 전차 한 대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서울은 가뭄과 높은 물가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이미 컸습니다. 참혹한 사고 현장이 쌓인 설움에 불을 붙인 셈입니다.
※ 희생된 어린이의 나이와 이름, 불탄 차량 대수는 자료마다 다르거나 확인되지 않아 이 글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전차가 가뭄을 불렀다’는 소문도 널리 회자되지만 1차 사료로 확인하지 못해 원인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사과 대신 나온 조건
사태는 다른 시설 파괴로 번지기 전에 가까스로 멈췄습니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일본인 종업원들은 무리한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전차마다 일본영사관 경찰관을 배치하거나, 승무원에게 권총 휴대를 허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곳은 대한제국의 수도 한복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한 것은 대한제국의 순검이 아니라 자기 나라 영사관의 경찰, 그리고 총이었습니다. 콜브란 측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공사관은 이를 구실로 운전수 10명과 기관사 2명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습니다.

두 달 반 멈춘 전차
서울 전차 소각 사건으로 운전수를 잃은 한성전기는 급히 미국에 연락해 1년 계약으로 기계기술자 2명, 차체수리사 1명, 운전수 3명, 관리자 1명 등 7명을 데려왔습니다. 이들이 한국인을 가르친 끝에 전차는 그해 8월 10일에야 다시 달렸습니다. 두 달 반 동안 서울의 신문물은 멈춰 서 있었습니다.
전차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줄다리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후에도 노선과 이권을 두고 콜브란 측과 계속 부딪혔고, 1903년 광화문 시민 폭동을 계기로 이듬해 1월에는 미국 수비대가 서울에 들어와 한성전기회사 시설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만평 읽기: 사실과 상징
| 그림 요소 | 구분 | 의미 |
|---|---|---|
| 불타는 전차 | 사실 | 1899년 5월 26일 사고 뒤 시민들이 전차를 불태움 |
| ‘개통 축하’ 현수막 | 상징 | 축하가 끝나기도 전에 닥친 비극 |
| ‘근대화’ 꼬리표 | 상징 | 불타는 것은 차량이 아니라 서두른 근대화 |
| 빈 운전대와 놋쇠 손잡이 | 상징 | 정답 뒤 ‘책임 대신 조건을 걸며 비운 자리’로 재해석 |
| 노란 비단 소매 “문명의 첫걸음이로다” | 창작 말풍선 | 근대화의 명분. 당시 외국 언론도 서울 전차를 문명화의 첫걸음으로 묘사함 |
| 군중 “그 걸음에 누가 밟혔소” | 창작 말풍선 | 명분 아래 치른 대가. 희생자는 그리지 않고 말로만 애도 |
| 흰옷 군중의 뒷모습 | 표현 선택 | 폭도가 아닌 설움으로 읽히도록 주먹·얼굴을 그리지 않음 |
오늘 다시 생각해 볼 질문
서울 전차 소각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고가 나면 먼저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누가 다쳤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보다 ‘누가 맡을 것인가’, ‘무엇을 보장해 줄 것인가’가 먼저 시끄러워지는 장면은 백이십여 년 전 종로에도 있었습니다.
서울의 전차는 1968년 11월 말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사라졌고, 이제 위례선 트램으로 다시 서울 노면 위에 전차가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새 전차가 달릴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무엇일지, 1899년의 운전대가 묻고 있습니다.
심화 퀴즈
Q. 일본인 운전수들이 떠난 뒤, 다시 달린 전차의 운전대는 어떻게 채워졌을까요?
① 일본인 운전수들이 조건을 얻고 돌아왔다
② 미국인이 와서 한국인을 가르쳤다
③ 대한제국 군인이 운전을 넘겨받았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입니다. 콜브란 측은 미국에서 운전수·기술자 등 7명을 1년 계약으로 데려와 한국인을 교육했고, 전차는 1899년 8월 10일 다시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로버트 네프의 정리에 따르면 처음엔 일본인 운전수와 한국인 차장이었다가, 사건 뒤 미국인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승무원 전원이 한국인이 됐습니다. 백성의 불길 뒤에서 운전대를 두고 다툰 것은 바다 건너 두 나라였던 셈입니다.
출처와 확인 메모
- 민병근(전기박물관 학예연구사), 「근대조명 – 한성전기회사의 채무분규와 한미전기회사의 발족 ⑦-2」, 『전기의 세계』 2014년 12월호. 원 출전 각주: 황성신문 1899.5.29·6.3·6.24·8.9, 독립신문 1899.8.11. 원문 PDF (확인 2026-10-02)
- Robert Neff, “Streetcars of Seoul: ‘first step toward civilization’”, The Korea Times, 2020.1.8. 기사 보기 (확인 2026-10-02)
- 서울특별시 문화분야 누리집,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전시 안내(개통일 1899.5.4). 안내문 보기 (확인 2026-10-02)
- 서울신문, 「추억의 노면전차, 노원구에서 다시 달린다」, 2017.5.19 — 홍릉 행차와 콜브란의 건의,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기사 보기 (확인 2026-10-02)
이 글의 사고·요구·철수·재개통 서술은 당시 신문을 각주로 제시한 학예연구사의 글에 근거합니다. 황성신문 원문 대조는 진행 중이며, 확인되는 대로 이 메모를 갱신합니다. 이 글의 만평 이미지는 모두 AI로 생성한 창작물이며 실제 당시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한컷만평퀴즈는 한 컷의 만평과 한 문제로 역사 속 결정과 대가를 읽는 시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