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철거를 막아선 손, 뜻밖의 주인

광화문 철거 계획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922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에 거대한 새 청사를 지으면서 궁궐의 정문 광화문을 헐어 없애려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광화문이 새 청사를 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이나 졸업 사진 속 광화문을 떠올려 보세요. 그 뒤에는 늘 돔을 얹은 커다란 석조 건물, ‘중앙청’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건물 때문에 광화문은 한때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철거 계획에 반대하는 글로 가장 널리 기억되는 사람은, 뜻밖에도 망치를 든 쪽 나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망치가 멈춘 뒤에도 광화문은 오랫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광화문까지 포함해서요.

이제 글 맨 위의 오늘의 한 컷을 보세요. 비계를 두른 거대한 돔 청사 앞, ‘총독부’ 꼬리표를 단 손이 작은 광화문 위로 쇠망치를 쳐들었습니다. 그 손은 “새 청사가 안 보이잖소”라고 투덜댑니다. 그런데 다른 손 하나가 그 손목을 꽉 붙잡고 외칩니다. “잠깐, 그 문만은!” 이상한 점은, 두 손이 모두 같은 쪽에서, 같은 양복 소매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 대표 만평 「1922년 · 광화문 철거 계획」은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망치를 붙잡는 손은 철거 반대 여론을 상징한 만평적 표현이며, 말풍선은 사료 인용이 아닌 창작 문구입니다.

30초 퀴즈: 망치를 붙잡은 손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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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22년, 총독부가 광화문을 헐려 하자 반대 글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 망치를 붙잡은 이 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① 조선의 유학자

② 일본의 평론가

③ 미국의 선교사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일본의 평론가입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2년 일본 잡지 『개조(改造)』 9월호에 광화문 철거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은 동아일보에도 번역되어 실렸습니다.

①을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궁궐 정문을 지키려 나선 사람이라면 조선 사람이 먼저 떠오르니까요. 하지만 그림 속 두 소매는 모두 양복이어서 도포 차림의 유학자와 맞지 않습니다. ③은 양복이라는 단서와는 맞지만, 붙잡은 손이 망치와 ‘같은 쪽’에서 나왔다는 단서와 맞지 않습니다.

그림을 다시 보세요. 망치를 든 손도, 막아선 손도 같은 쪽에서 나왔습니다. 철거를 결정한 나라 안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 것입니다.

경복궁 앞을 막아선 새 청사

광화문 철거 이야기는 박람회에서 시작됩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5년 가을 경복궁에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50일 동안 열었습니다. 박람회 부지를 만들려고 수많은 전각을 헐었고, 박람회가 끝난 뒤 바로 그 자리에 총독부 청사를 짓기로 했습니다.

청사는 1916년 6월 착공해 10년 가까이 공사한 끝에 1925년 12월 완공됐습니다. 이듬해 1월부터 업무를 시작했고, 1926년 10월 1일 성대한 낙성식을 열었습니다. 자리는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궁궐의 한가운데였습니다.

문제는 그 앞에 선 광화문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총독부가 광화문이 청사를 가린다는 이유로 없애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만평 속 말풍선 “새 청사가 안 보이잖소”는 바로 이 이유를 한 문장으로 옮긴 것입니다.

1922년, 광화문 철거에 맞선 목소리

철거 계획이 알려지자 반대 여론이 나라 안팎에서 크게 일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기억되는 글이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입니다. 그는 1922년 일본 잡지 『개조』 9월호에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실어 자기 나라의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동아일보도 이 글을 번역해 실었습니다.

야나기는 조선의 도자기와 공예에 깊이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1924년에는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망치를 든 나라의 지식인이 망치를 든 손목을 붙잡은 셈입니다.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

야나기의 글이 실린 곳을 국가유산청의 한 자료는 요미우리신문으로 적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유산청의 다른 자료와 여러 백과사전은 『개조』 9월호로 적습니다. 이 글은 『개조』로 썼습니다.

또 일부 기사는 야나기의 글 덕분에 총독부가 철거 계획을 거뒀다고 씁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과 국가유산청은 ‘극심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야나기의 글을 여러 반대 목소리 가운데 하나로 다룹니다.

야나기를 보는 눈도 하나가 아닙니다. 식민지의 문화를 지키려 한 ‘조선의 친구’라는 평가가 있는 한편, 조선의 미를 ‘슬픔의 미’로 규정한 그의 시각에 식민지적 시선이 담겼다는 비판도 함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학자들은 지금도 이 두 얼굴을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헐려 짓는 광화문: 1926~1927년

반대 여론에 부딪힌 총독부는 광화문을 완전히 없애는 대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광화문은 1926년 7월 22일 해체되기 시작해, 1927년 9월 15일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자리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함께 서 있던 흥례문과 그 회랑, 궁궐 안 물길 금천과 그 위의 영제교는 이때 헐렸습니다.

해체가 막 시작된 1926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는 「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사설이 실렸습니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필자는 기자 설의식입니다. 그는 총독부 청사 때문에 헐리고, 총독부의 정책 덕분에 다시 지어지는 광화문의 처지를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지붕에서 울리는 망치 소리가 장안을 지나 북악과 남산에까지 부딪친다고 적었습니다. 이 만평의 망치는 바로 그 소리에서 가져왔습니다.

광화문 철거 대신 1927년 이전이 결정된 뒤, 改造 잡지를 든 회색 양복 손이 드러나고 광화문 문루가 굴림대에 실려 옆으로 옮겨지는 AI 생성 만평 정답 컷
「1927년 · 옮겨진 광화문」 정답 컷 — AI 생성 이미지. 문을 굴림대로 옮기는 장면은 해체 후 이전을 압축한 만평적 표현입니다.

망치는 멈췄습니다. 하지만 문은 자리를 잃었습니다. 궁궐의 얼굴이던 정문이 궁궐 옆구리로 밀려나고, 그 자리는 총독부 청사의 앞마당이 됐습니다.

만평 읽기: 사실과 상징

그림 속 요소 구분 근거와 뜻
비계를 두른 돔 청사 사실 1922년 청사는 공사 중이었고 1925년 12월 완공(국가기록원)
청사와 광화문의 크기 차이 과장 지배의 상징이 궁궐의 얼굴을 압도한 구도를 보이려는 만평적 과장
‘총독부’ 꼬리표의 망치 든 손 상징 철거 계획을 손 하나로 표현. 특정 인물을 가리키지 않음
손목을 붙잡은 회색 양복 손 상징 철거 반대 여론, 그 가운데 야나기의 글. 야나기의 얼굴은 그리지 않음
“새 청사가 안 보이잖소” 창작 문구 ‘청사를 가린다’는 철거 이유(국가기록원)를 옮긴 말풍선
“잠깐, 그 문만은!” 창작 문구 야나기의 글을 인용한 것이 아닌 만평 말풍선
쇠망치 상징 1926년 동아일보 사설이 그린 광화문 지붕의 망치 소리에서 가져옴
흰옷의 세 사람 상징 자기 궁궐의 문이 헐리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처음에는 공사판의 불평처럼 들리던 “새 청사가 안 보이잖소”가, 정답을 알고 나면 다르게 들립니다. 광화문이 헐려야 했던 이유는 낡아서도, 위험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지배하는 쪽의 건물을 가렸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오늘의 질문: 사진 속 그 광화문

궁궐 옆으로 밀려난 광화문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나무로 된 문루가 불타고, 돌로 쌓은 석축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1968년, 정부는 그 석축 위를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워 광화문을 경복궁 정면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40대 이상이라면 이 광화문을 기억하실 겁니다. 수학여행 단체 사진, 졸업 기념사진, 서울 구경 엽서 속 광화문. 그 뒤에는 늘 중앙청의 돔이 보였습니다. 해방되고 23년 만에 궁궐 정면으로 돌아온 문이었으니, 이제 제자리를 찾았다고 믿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그 광화문은 사실 똑바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원래 자리에서 조금 비켜서, 아주 살짝 비스듬히 서 있었습니다. 무엇에 줄을 맞췄기 때문일까요? 아래 심화 퀴즈로 확인해 보세요.

심화 퀴즈

Q. 1968년, 불타 버린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습니다. 이 문은 무엇에 줄을 맞춰 섰을까요?

① 경복궁 근정전

② 옛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

③ 경복궁 뒤 북악산 정상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옛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입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68년의 광화문은 정확한 고증 없이 복원된 탓에, 옛 총독부 건물과는 일직선이지만 근정전과는 축이 뒤틀린 채 세워졌습니다. 근정전의 중심축과 3.75도 어긋났고, 도로 문제로 원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벗어나 있었습니다.

①을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궁궐의 정문이니 당연히 궁궐의 중심 건물에 맞췄으리라 생각하게 되니까요. ③의 북악산 역시 경복궁의 뒷산이라 그럴듯하지만, 1968년의 문은 궁궐 쪽 어느 축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총독부 건물이 서 있던 방향입니다. 국가기록원은 옛 총독부 건물이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그리고 남산의 조선신궁과 일직선이 되도록 지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지난 편에서 본 그 남산 신궁입니다. 신궁은 1945년에 사라졌지만, 총독부가 그은 그 선은 해방 뒤에도 남아 광화문의 방향을 정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광화문 철거 이후 1968년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광화문이 중앙청 돔과 남산을 잇는 점선 위에 서고, 궁궐 중심축을 뜻하는 주홍 점선과 살짝 어긋난 AI 생성 만평
「1968년 · 다시 세운 광화문」 — AI 생성 이미지. 두 축의 어긋남(실제 3.75도)은 눈에 보이도록 과장했습니다.

광화문이 제자리와 제 방향을 되찾은 것은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나서입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옛 총독부 건물이 철거됐고, 2006년 12월 콘크리트 광화문을 헐어 낸 뒤 발굴조사로 원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2010년 8월 15일, 광화문은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옮겨지고 시계 방향으로 3.75도 돌아서 나무로 된 원래 모습으로 다시 섰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광화문은 근정문, 흥례문과 정확히 평행을 이룹니다. 복원 전 남산 쪽을 바라보던 문은, 처음 지어질 때처럼 관악산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1927년 자리를 잃은 지 83년 만의 일입니다.

다음에 광화문 광장에 서게 되면, 열린 문 사이를 한번 들여다보세요. 문 너머로 흥례문이 똑바로 보인다면, 그것이 되찾은 3.75도입니다. 여러분의 사진첩 속 광화문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난 편 심화 퀴즈 다시 풀기 · 6편 남산 조선신궁

Q. 1945년 해방 직후, 남산 조선신궁을 헐어 없앤 것은 누구였을까요?

① 일본 측이 의식을 치르고 스스로 해체

② 서울 시민들이 몰려가 불태움

③ 미군정이 들어와 철거 명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① 일본 측이 의식을 치르고 스스로 해체입니다. 일본은 광복 직후 신령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을 치르고, 예배 대상물은 일본으로 보낸 뒤 나머지를 불태웠고, 미군 진주가 다가오자 신궁을 스스로 해체했습니다.

②를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해방 뒤 다른 지역의 신사들은 우리 손으로 부서진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산 조선신궁만은 일본인들이 직접 거둬 갔습니다. 해체에 나선 것은 미군정이 아니라 신궁을 세운 일본 측이었으므로 ③도 맞지 않습니다.

이야기 전체는 「남산 조선신궁, 꼭대기 사당이 쫓겨난 이유」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출처와 확인 메모

  • 국가기록원 「우리에게 있어서 광화문이란」 — 조선물산공진회와 청사 건립, 광화문을 없애려 한 이유와 이전, 1950년 소실, 1968년 복원의 축과 위치, 2010년 복원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4)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청사(광화문)」 — 1916년 착공, 1925년 12월 완공, 1926년 낙성식, 광화문 이전과 흥례문·회랑·금천·영제교 철거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4)
  • 국가유산청 「소오 설의식」 — 야나기의 1922년 『개조』 9월호 기고, 나라 안팎의 반대 여론, 1926.7.22 해체 시작과 1927.9.15 이전, 1926.8.11 동아일보 사설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4)
  • 국가유산청 「돌아온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2010 — 동아일보의 야나기 글 번역 게재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4)
  • 매일신문 [명문을 찾아서] 「헐려짓는 광화문」, 2006.6.27 — 1926.8.11 동아일보 사설 재수록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4)
  • 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2016.7.15 — 야나기의 『개조』 기고와 철거 계획 철회 서술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4)
  • 서울신문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문화 사랑 진정성 있나」, 2013.1.11 — 야나기를 둘러싼 두 평가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4)
  • 서울신문 「광화문 다시 열린다」, 2010.8.14 — 2010년 복원의 이동 거리와 회전 각도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4)
  • 서울신문 「’복원 광화문’ 4년전과 어떻게 달라졌나」, 2010.8.15 — 근정전·흥례문과의 평행, 문 사이로 보이는 흥례문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4)
  • 프레시안 「광화문, 38년 만에 콘크리트 옷 벗는다」, 2006 — 남산을 바라보던 문이 관악산을 바라보게 됨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4)
  • 강난형·송인호, 「1960년대 광화문 중건과정의 특성」, 『건축역사연구』 24-6, 2015 — 1968년 광화문의 입지 · 논문 보기 (확인 2026-10-14)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은 번역본마다 문장이 달라 직접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개조』와 1926년 동아일보 사설은 원문 대조를 진행 중이며, 이 글은 국가기록원·국가유산청 자료를 기준으로 썼습니다. 청사의 완공 시점은 1925년 12월(완공)과 1926년 10월(낙성식)을 구분해 적었습니다. 이 글의 만평 이미지는 모두 AI로 생성한 창작물이며 실제 당시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한컷만평퀴즈는 한 컷의 만평과 한 문제로 역사 속 결정과 대가를 읽는 시리즈입니다. 다른 편도 함께 풀어 보세요.

· 1편 · 일장기 말소 사건 — 검열을 통과한 신문, 그 뒤의 결말

· 2편 · 서울 전차 소각 사건(1899) — 사과 대신 나온 조건

· 3편 · 고종 커피 독살 사건, 진짜 싸움은 법정이었다

· 4편 · 윤봉길 도시락 폭탄의 진실 — 실제로 던진 것은 물통

· 5편 · 창경원 동물원의 명분은? 궁궐에서 ‘궁’이 지워진 날

· 6편 · 남산 조선신궁, 꼭대기 사당이 쫓겨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