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 동물원의 명분은? 궁궐에서 ‘궁’이 지워진 날

봄이면 도시락을 싸 들고 원숭이와 사자를 보러 가던 곳, 밤이면 등불 아래 벚꽃 구경으로 북적이던 곳. 많은 분들이 창경원 동물원을 소풍의 추억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원래 동물원이 아니라 조선의 궁궐, 창경궁이었습니다. 1909년 궁궐 마당에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이 들어섰고, 1911년부터는 이름에서 ‘궁(宮)’이 빠지고 ‘원(苑)’이 붙었습니다. 그 이름이 다시 ‘궁’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되고도 38년이 지난 1983년의 일입니다.

정말 곱씹을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궁궐 안에 동물원을 짓자는 계획이 처음 나올 때 내건 이유입니다. 그 명분을 알고 나면, 우리가 정겹게 부르던 이름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이제 글 맨 위의 오늘의 한 컷을 보세요. 궁궐 현판에서 소매만 보이는 손이 지렛대로 ‘宮’ 글자를 떼어내고, 다른 손에는 ‘苑’ 판을 들고 있습니다. 손의 주인은 “다 좋자고 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대체 누구 좋자는 일이었을까요?

※ 대표 만평 「1909년 · 궁궐에 동물원」은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1909년 공개와 1911년 개칭을 한 장면에 압축한 만평적 표현이며, 현판 글자를 떼는 장면과 말풍선은 상징입니다.

30초 퀴즈: 처음 내건 명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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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09년, 궁궐 안에 동물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계획이 처음 나올 때 내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① 일본인 거류민의 놀이터로
② 새 황제 순종의 소일거리로
③ 물러난 고종의 위안거리로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새 황제 순종의 소일거리입니다. 고종이 강제로 물러난 뒤 덕수궁에 머물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때 이완용·이윤용 형제가 홀로 떨어진 황제의 소일거리를 걱정하자, 일본인 궁내부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가 바로 옆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창경원 동물원은 순종이 머문 창덕궁 바로 옆에 섰습니다. 덕수궁의 고종을 위한 것이었다면 자리가 맞지 않습니다.

①을 고르셨다면 반은 맞힌 셈입니다. 명분은 황제였지만, 훗날 창경원 벚꽃놀이 인파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는 당시 신문 기사도 전합니다. 위로받는다던 황제 대신 즐거워진 쪽은 구경꾼이었습니다.

창경궁은 어떤 궁이었나

창경궁의 뿌리는 1418년 세종이 상왕 태종을 모시려고 지은 수강궁입니다. 성종은 이 궁을 크게 손봐 할머니 정희왕후,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 양어머니 안순왕후, 세 대비를 모셨고 이름을 창경궁이라 했습니다. 창덕궁과 담을 맞대고 있어 두 궁을 함께 ‘동궐(東闕)’이라 불렀고, 남쪽으로는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숲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정조·순조·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왕실 가족의 살림이 유난히 짙게 밴 궁이었습니다. 효심으로 고쳐 지은 궁, 왕실의 어른을 모시던 궁. 그 궁의 마당이 동물원이 됩니다.

창경원 동물원의 시작: “황제의 소일거리”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앉혔습니다.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궁내부 차관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인 고미야 미호마쓰가 들어왔습니다. 물러난 고종은 덕수궁에, 새 황제 순종은 창덕궁에 머물게 되면서 두 황제는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이때 오간 대화가 창경원 동물원의 출발점입니다. 이완용·이윤용 형제가 홀로 떨어진 황제에게 소일거리가 없겠느냐고 하자, 고미야가 이틀 만에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짓자는 계획을 들고 왔습니다. 1912년에 나온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사진첩』도 박물관이 ‘황제의 무료함을 달래드릴 오락’으로 발의됐다고 적었습니다.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

이 대화가 오간 날짜는 자료마다 1907년 11월과 1908년 11월로 엇갈립니다. 계획의 주인공도 갈립니다. 당시 궁내부에 근무한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는 이토 히로부미가 궁내부 대신과 차관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 설립을 명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날짜를 하나로 정하지 않고, 계획은 ‘통감부 쪽이 주도했다’고만 씁니다.

1909년 11월 1일, 궁궐 문이 열리다

1908년 봄부터는 서울에서 사설 동물원을 운영하던 이를 데려와 그가 기르던 곰·원숭이·낙타 같은 동물을 사들였고, 명정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 같은 전각을 고쳐 유물 진열실로 썼습니다. 그리고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은 일반에 공개됩니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지 며칠 뒤여서 성대한 개장식은 함께 열리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공개할 때 내건 명분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순종실록』에 따르면 순종은 진기한 동식물과 유물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며 개방을 지시했습니다. 처음에는 ‘황제의 소일거리’, 문을 열 때는 ‘백성과 함께’. 명분은 두 겹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서울 안내서는 이 시설을 이토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하려고 계획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대도 있었습니다. 유서 깊은 궁전에 관곽까지 늘어놓고 사람들이 흙 묻은 발로 드나들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목소리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11년에는 일본식 박물관 본관 건물까지 궁 안에 들어섰습니다.

‘궁’이 ‘원’이 되다

1911년 4월 26일부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습니다(『순종실록』 부록). 새로 붙은 ‘원(苑)’은 본래 울타리를 쳐서 짐승과 나무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고미야는 훗날 창덕궁(창경궁 포함)이 바깥에서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보여야 좋다고 말했습니다. 황제를 위로하겠다던 선물이, 황제의 집을 들여다보는 진열장으로 바꿔 놓은 셈입니다.

1908~1909년 무렵 일본인들이 궁 안에 벚나무를 심었고, 나무가 자라자 창경원은 해마다 봄이면 놀이동산이 됐습니다. 1924년 봄부터는 등불을 밝힌 밤벚꽃놀이, 이른바 ‘야앵(夜櫻)’이 시작됐습니다. 1932년에는 종묘를 가로지르는 도로(지금의 율곡로)가 뚫려, 숲으로 이어져 있던 창경궁과 종묘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창경원 동물원 시절인 1924년 밤벚꽃놀이, 어두운 옛 정전 지붕 아래 등불과 벚꽃 사이를 구경꾼들이 뒷모습으로 거니는 AI 생성 만평
「1924년 · 궁궐의 밤벚꽃」 — AI 생성 이미지. 불 꺼진 정전과 밝은 등불의 대비는 만평적 표현입니다.
창경원 동물원으로 바뀐 뒤 현판이 昌慶苑으로 바뀌고, 떼어진 주홍빛 '宮' 판이 벚꽃잎 사이 돌계단에 놓인 AI 생성 만평 정답 컷
「1911년 · 창경원」 정답 컷 — AI 생성 이미지. ‘황제의 집’이 ‘구경거리’가 된 라벨 반전은 만평적 표현입니다.

해방 후 38년, 이름이 돌아오기까지

1945년 해방이 됐지만 이름은 그대로였습니다. 전쟁을 지나고 산업화를 지나는 동안에도 창경원 동물원은 서울 사람들의 대표 나들이 터였습니다. 1983년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 복원 계획을 내놓았고, 그해 9월부터 동물과 식물을 지금의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3년 12월 30일,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이름은 하루 만에 돌아왔지만, 궁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멘트 동물사와 매점을 걷어 내고 문정전과 명정전 행각을 다시 세워 복원을 마친 것은 1986년 8월 23일입니다. 율곡로로 끊긴 종묘와의 숲길은 서울시가 도로를 지하로 넣고 담장을 되살린 끝에 2022년 7월에야 다시 이어졌습니다.

만평 읽기: 사실과 상징

그림 속 요소 구분 근거와 뜻
동물원·벚꽃·구경꾼 사실 1909년 공개, 1924년 밤벚꽃놀이 시작
‘宮’을 떼고 ‘苑’을 붙이는 손 상징 1911년 개칭을 행동 하나로 압축. 실제로 현판을 떼는 장면 기록은 아님
소매만 보이는 손 · ‘통감부’ 상징 계획을 주도한 통감부 쪽. 특정 인물의 얼굴은 그리지 않음
“다 좋자고 하는 일입니다” 창작 문구 사료 인용이 아닌 만평 말풍선. ‘황제 위로’라는 명분을 꼬집음
한 장면 속 1909년과 1911년 만평적 압축 공개(1909)와 개칭(1911) 사이 약 1년 반을 한 컷에 담음

그림을 다시 보면 말풍선이 다르게 읽힙니다. 처음에는 선의의 명분처럼 들리던 “다 좋자고 하는 일”이, 정답을 알고 나면 ‘누구에게 좋은 일인가’를 묻게 합니다. 꼬리표 ‘황제의 집’은 그렇게 ‘구경거리’가 됐습니다.

오늘의 질문: 우리가 정겹게 부른 이름들

창경원과 꼭 닮은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졸업장에 찍혀 있는 ‘국민학교‘입니다. 이 이름은 1941년 일제의 국민학교령으로 붙었습니다. 황국의 신민, 곧 천황의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뀐 것은 1996년 3월 1일, 해방되고 51년 뒤였습니다.

두 이름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누가, 왜 붙였는지 모른 채 우리는 그 이름으로 소풍을 가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 다 해방 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바뀌었습니다.

닮은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국민학교 이름을 바꾸던 1995년, 현장 교사들 사이에서는 간판만 바꾸고 교실의 차렷·경례 같은 군대식 관행을 그대로 두면 소용없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창경궁도 그랬습니다. 이름은 1983년 12월 하루 만에 돌아왔지만, 전각이 다시 서기까지 3년, 종묘와 숲길이 다시 이어지기까지는 39년이 더 걸렸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건 하루지만, 제자리를 찾는 건 세월이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벚꽃 아래의 추억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시락을 펼치던 가족의 웃음은 진짜였습니다. 다만 그 웃음이 피어난 자리가 원래 누구의 집이었는지 알고 나면, 같은 사진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의 앨범 속 ‘창경원’ 사진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나요?

심화 퀴즈

Q. 해방 뒤에도 쓰이던 ‘창경원’이라는 이름은 언제 ‘창경궁’으로 돌아왔을까요?

① 1945년 해방 직후
② 1983년 12월
③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1983년 12월입니다. 창경원 동물원의 동식물을 1983년 9월부터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1983년 12월 30일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해방 후 38년 만입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곳곳을 정비하던 시기와 겹쳐 ③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름은 그보다 먼저 돌아왔고 복원 공사는 1986년 8월에 마무리됐습니다.

출처와 확인 메모

  • 주간경향 [이기환의 Hi-story](85) 「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이토 히로부미」, 2023.5.26 — 이완용 형제와 고미야의 대화, 곤도 시로스케 증언, 1911.4.26 개칭(『순종실록』 부록), ‘苑’의 뜻, 고미야의 ‘유리그릇’ 발언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주간경향 [이기환의 Hi-story](30) 「창경궁이 ‘벚꽃놀이 최대명소’ 됐던 사연」, 2022.4.18 — 『순종실록』 1909.11.1 공개, 벚나무 식재, 1924년 밤벚꽃놀이, 일본인 관람객 비중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매일신문 「박물관 100년과 어원박물관」, 2009 — 1909.11.1 공개와 개장식 사정, 1911년 박물관 본관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내 손안에 서울 「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종묘 90년 만에 연결」, 2022.7.20 — 1932년 종묘관통도로 개설, 2022년 재연결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뉴스서울 「창경궁 명칭 환원 40주년」, 2023.4.18(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발표) — 1983.9 동식물 이관, 1983.12.30 명칭 환원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국가기록원 「다시 피어나다 창경궁」 — 1986.8.23 복원정비 완료 · 자료 보기 (확인 2026-10-07)
  • 내 손안에 서울 「놓치기 쉬운 창경궁의 명소」, 2021.2.22 — 정조·순조·헌종 탄생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시대 「’국민학교’서 ‘초등학교’로」, 2025 — 1941년 국민학교령, 1996.3.1 명칭 변경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 서울신문 「국교 명칭 변경 계기 교사들 동참」, 1995.8.14 · 기사 보기 (확인 2026-10-07)

일부 소개 자료에는 율곡로 개설이 1912년으로 적혀 있으나, 서울시 복원사업 자료에 따라 1932년으로 썼습니다. 고미야와 이완용 형제의 대화 날짜, 순종의 창덕궁 이어 시점은 자료마다 달라 연도를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실록』 1909년 11월 1일 기사는 신문 인용을 통해 확인했으며 원문 대조를 진행 중입니다. 이 글의 만평 이미지는 모두 AI로 생성한 창작물이며 실제 당시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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