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광장에는 지팡이를 쥔 노인의 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그 앞을 지나가지만, 걸음을 멈추고 이름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동상의 주인은 강우규. 1919년 9월 2일, 바로 이 자리(당시 남대문정거장)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때 그는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지하철 경로우대를 받을 나이 즈음입니다. 그리고 거사 보름 뒤, 이 노인을 붙잡은 손은 뜻밖의 손이었습니다. 한 컷 만평과 30초 퀴즈로 먼저 만나 보세요.
만평 읽기: 세 개의 손
이 만평에는 손이 세 개 나옵니다.
- 칼을 칼집에 넣는 흰 장갑의 손: 새 총독입니다. 말풍선은 “이제 칼은 거두겠소”. 3·1운동 뒤 헌병의 칼로 다스리던 시대를 끝내겠다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명분을 만평 문구로 줄인 것입니다.
- 지팡이를 꽉 쥔 주름진 손: 환영 인파 속의 강우규입니다.
- 군중 사이에서 뻗어 오는 흐릿한 점선 손: 이 손이 바로 오늘의 문제입니다. 점선으로 그린 것은 이 손이 그날이 아니라 보름 뒤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Q. 보름 뒤, 이 노인을 붙잡은 손은 누구의 손이었을까요?
① 조선인 헌병보조원 ② 조선인 경찰 ③ 일본인 경찰
힌트: 총독은 “칼을 거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흐릿한 손이 어느 쪽에서 나오는지 보세요.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조선인 경찰입니다. 1919년 9월 17일 그를 체포한 사람은 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섰던 조선인 경찰 간부 김태석이었습니다.
두 단서로 풀 수 있습니다. 총독은 “칼을 거두겠다”고 했고, 실제로 헌병이 경찰 일을 맡던 제도는 그해 8월 보통 경찰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헌병 쪽인 ①은 아닙니다. 또 흐릿한 손은 경비병 쪽이 아니라 흰 두루마기 군중 사이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③도 아닙니다.

이제 처음 그림이 다르게 보입니다. 흐릿한 손은 칼 찬 경비병 쪽이 아니라 흰 두루마기 군중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총독이 거둔다던 칼의 빈자리에 들어온 것은 같은 말을 쓰는 손이었습니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정거장
그날 오후 5시쯤,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남대문역에 들어왔습니다. 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쌍두마차에 오르려 할 때, 남산 쪽 한양공원에서 부임을 축하하는 예포가 스물한 발 울렸습니다. 예포가 끝나고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순간, 마차 가까이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총독은 살아남았습니다. 폭탄이 마차까지 닿지 못했고 위력도 약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변의 일본 경찰과 수행원, 신문기자 등 수십 명이 다치거나 숨졌습니다.
던진 사람은 강우규.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나 한의사로 살았고, 나라가 망한 뒤 만주로 건너가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919년 연해주의 노인동맹단에 몸담은 그는 러시아인에게서 폭탄을 사서 원산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의열 투쟁가라고 하면 흔히 젊은 청년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상하이에서 물통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스물넷이었습니다. 이 노인은 그보다 마흔 살 가까이 많았고, 의열 투쟁가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축에 듭니다.
칼은 거뒀는데, 경찰은 늘었다

사이토가 내건 ‘문화통치’는 무단통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1910년대에는 헌병이 경찰 일을 맡았고, 관리와 학교 교원까지 제복에 칼을 찼습니다. 1919년 8월 헌병 경찰제는 보통 경찰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칼 찬 헌병이 물러난 자리에서 경찰 관서와 인원은 오히려 크게 늘었습니다. 감시는 더 촘촘해졌고, 그 일을 맡은 사람 가운데에는 조선인 경찰도 있었습니다. 노인을 붙잡은 손이 그런 손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며칠 동안 수소문한 끝에 폭탄을 던진 사람이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거사 보름 만인 9월 17일, 조선인 경찰 김태석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단두대 위의 봄바람
강우규는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국가보훈처 자료에는 형 집행 직전 남겼다고 전하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오늘의 서울역에서
1986년 서울역 대합실 앞에 의거 기념 표석이 놓였고, 2011년 서울역 광장에 동상이 섰습니다. 그가 폭탄을 던진 그 자리를 지금 우리는 출퇴근길과 명절 귀성길에 지나갑니다.
그를 붙잡은 손의 이야기도 해방과 함께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말은 아래 심화 퀴즈에 남겨 두었습니다.
사실과 만평 상징 구분
| 구분 | 내용 |
|---|---|
| 사료로 확인된 사실 | 1919.9.2 남대문역 투탄, 새 총독 사이토 부임, 환갑을 넘긴 나이, 쌍두마차·예포, 총독 생존, 9.17 조선인 경찰에게 체포, 1920.11.29 순국, 문화통치기 경찰 증가 |
| 만평 상징 | 칼을 칼집에 넣는 손, 말풍선 “이제 칼은 거두겠소”(실제 발언 아님), 지팡이, 주홍 꼬리표, 끝없이 늘어선 경찰모 |
| 만평적 과장 | 보름 뒤의 체포를 거사 현장에 점선 손으로 겹쳐 그림(시간 역전), 총독의 정복 모양 |
| 자료마다 다른 대목 | 나이 64세·65세(만 나이와 세는나이 차이), 체포 장소 가회동·사직동, 피해 규모와 투척 거리 |
심화 퀴즈
Q. 노인을 붙잡은 그 조선인 경찰은 해방 뒤 반민특위 재판에서 어떻게 됐을까요?
① 사형이 집행됐다
②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재심에서 풀려났다
③ 해외로 도주해 재판을 피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입니다. 김태석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돼 한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경찰의 습격과 정치적 압력 속에 힘을 잃으면서 재심을 거쳐 풀려났습니다.
노인을 붙잡은 손은 해방 뒤에도 끝내 제대로 된 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칼을 거둔 자리에 들어온 손을 우리 손으로 걷어 내는 일도 그만큼 어려웠던 셈입니다.
출처와 확인 메모
- 서울신문 「의열 독립투쟁(2) 강우규 의사」 1999.8.20 — 거사 경위, 나이, 폭탄 구입, 체포
- 국가보훈처 자료(뉴데일리 「강우규 선생 의거 95주년」 2014.9.1) — 노인동맹단, 피해, 체포, 순국, 유시, 훈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우규’ — 출생과 생애
-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 — 체포한 경찰의 계급, 순국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47 — 보통 경찰제 전환과 경찰 증가
- 경향신문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 – 반민특위 사건(하)」 2014.11.2 — 김태석 재판 결과
- 세계일보 2016.9.25 — 1986년 기념 표석, 2011년 동상
확인 메모: 나이는 자료에 따라 64세 또는 65세로 적혀 있어 이 글에서는 ‘환갑을 넘긴’으로 표기했습니다. 체포 장소와 피해 규모도 자료마다 달라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의 만평은 AI로 생성한 창작 이미지입니다. (확인일 2026-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