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낸 자는 참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법은, 옮긴 자를 그 옆에 세웠습니다.”
가짜뉴스 처벌을 두고 논쟁이 붙을 때마다 되풀이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만든 사람과 옮긴 사람,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600년 전 조선은 이 질문에 이미 한 줄로 답해 두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조선 요언죄가 남긴 기록입니다.
먼저 법조문을 확인하고, 옮긴 사람의 형량과 세종 3년의 교지를 차례로 읽은 뒤, 현대 통찰과 퀴즈 정답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 조선 요언죄는 어떤 법이었나
조선은 독자적인 형법전을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경국대전』 「형전」은 형사 사건에 명나라 형법전인 『대명률』을 쓰도록 명시했고, 이 원칙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됐습니다. 1395년에는 관리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두를 섞어 풀어 쓴 『대명률직해』가 간행됐습니다.
그 안에 「형률」 적도편 조요서요언조가 있습니다. 참위서나 요망한 글,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사람들을 흔든 자를 다스리는 조문입니다. 형량은 참형. 조선의 다섯 가지 형벌 가운데 가장 무거운 쪽에 속합니다.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요언죄가 지금도 서늘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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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어낸 사람과 옮긴 사람, 나누지 않았다
조선 요언죄의 조문은 지어낸 행위와 함께 ‘전용(傳用)’, 곧 옮겨 퍼뜨려 쓰는 행위를 나란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주석은 이렇게 못 박습니다. 처음 지어낸 자와 그 말을 옮겨 쓴 자를 수범과 종범으로 나누지 않고 모두 참형에 처한다.
보통의 형률은 주동자와 가담자를 갈라 형을 낮춥니다. 이 조문만은 그 계단을 없앴습니다. 소문이라는 것이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옮겨지는 순간에 힘을 얻는다는 판단이 조문 안에 들어 있는 셈입니다.
한 단계 더 있습니다. 남이 전한 글을 집에 두고 관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형이 있었습니다. 퍼뜨리지 않았더라도, 갖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형이 매겨졌습니다. 구체적인 형량은 아래 심화퀴즈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1421년, 세종이 다시 꺼낸 교지
조문이 종이 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종실록』 세종 3년, 그러니까 1421년 12월 8일 기사에는 익명의 글을 금하는 명이 실려 있습니다. 세종은 3년 전 아버지 태종이 내린 교지를 그대로 다시 꺼냈습니다.
교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남의 죄를 꾸며 붙인 글은, 처음 본 사람이 즉시 찢거나 태워 없앨 것.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 해도 그 말을 옮겨 시끄럽게 하지 말 것. 태우지 않고 말을 옮긴 자는 요언과 요서를 다스리는 율로 크게 징계할 것.
읽은 사람에게 삭제 의무를 지운 것입니다. 세종은 이 법이 근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앞으로는 말을 옮긴 자에게 옛 왕지대로 시행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조선 요언죄가 실제로 겨눈 과녁이 어디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4. 만평 해설 — 연출장치 둘
연출장치 ①: 수묵으로 그린 스마트폰. 화면에는 공유 횟수만 떠 있습니다. 그림 전체에서 유일한 현대 사물이자, 인물 셋이 이루는 삼각 구도의 꼭짓점입니다. 붓으로 그려진 기계라는 어긋남이 시선을 붙잡습니다.
연출장치 ②: 찢으려다 멈춘 손. 오른쪽 인물은 벽에 붙은 이름 없는 글을 잡았지만 아직 찢지 못했습니다. 태종의 교지가 요구한 바로 그 동작이, 실행 직전에서 정지해 있습니다. 뒤쪽 두 사람은 이미 입을 가리고 말을 옮기는 중입니다.

5. 현대 통찰 — 붓과 공유 버튼
전용(傳用) ↔ 공유 버튼: 수단만 바뀐 자리
조선에서 말을 옮기는 수단은 입과 붓이었습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입니다. 도구는 완전히 달라졌는데, 그 도구가 놓인 자리는 묘하게 겹칩니다. 국가가 위험하다고 본 지점이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옮겨지는 순간’이었다는 것. 수단만 바뀌었습니다.
세 자리의 사람: 만든 사람 · 옮긴 사람 · 갖고 있던 사람
조선 요언죄가 그린 구조는 세 층입니다. 지어낸 사람, 옮긴 사람, 그리고 받아만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대개 이 셋 중 하나입니다. 링크를 만든 적은 없지만 단톡방에 붙여 넣은 적은 있고, 붙여 넣지 않았어도 캡처는 남아 있습니다.
물론 형벌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참형과 오늘의 법은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누구를 문제의 당사자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의 모양은, 600년을 사이에 두고 닮아 있습니다.
퀴즈 정답
문제. 지어낸 사람은 참형이었습니다. 그럼 옮기기만 한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정답. 3번 — 지어낸 사람과 같은 참형. 조선 요언죄의 조문 주석은 처음 지어낸 자와 옮겨 쓴 자를 수범·종범으로 나누지 않고 모두 참형에 처한다고 적었습니다. 형을 한 등급 낮추는 통상의 원칙이 이 조문에서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심화퀴즈. 남이 전한 요서를 받았지만 퍼뜨리지 않고 집에 그냥 두었고, 관에 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조선의 법이 매긴 형은 무엇이었을까요? (정답은 제6편에서 공개합니다)
지난 편 심화퀴즈 정답. 문제는 “포폄 대상에서 제외된 관청은 어디였을까요?”였습니다. 정답은 사헌부·사간원입니다. 감찰과 간쟁을 맡은 기관이 인사평가에 묶이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대상에서 빼두었습니다.
다음 편 예고
계약서를 믿고 보증금을 넣었는데 집주인이 사라졌습니다. 도장은 분명히 찍혀 있었습니다. 다음 편, 계약서 이야기입니다.
조선 요언죄는 소문을 만든 사람만 겨눈 법이 아니었습니다. 옮긴 사람, 그리고 갖고만 있던 사람까지 조문 안에 적어 넣은 법이었습니다. 오늘 손가락이 멈칫하는 그 0.5초는, 600년 전에도 있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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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1차 사료 보기
『경국대전』 「형전」 용률조 / 『대명률』 「형률」 적도편 조요서요언조 및 찬주 / 『대명률직해』(1395) / 『세종실록』 세종 3년(1421) 12월 8일 익명 방문 금령 / 『고종실록』 3년(1866) 1월 5일 형조 계 — 조요서요언 율문 인용.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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