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습니다. 다만, 몫은 주지 않았습니다.
갑질 신고 뉴스가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은 맨 위가 아닌 경우가 많죠. 바로 위, 그 사람입니다. 왜 하필 중간일까요.
육백 년 전 조선에도 그 자리가 있었습니다. 고을 관아의 실무를 통째로 쥐고 있던 사람들, 조선 아전입니다. 백성이 관청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얼굴은 수령이 아니라 이들이었고요. 그런데 나라가 이들에게 끝내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전이라는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나라가 무엇을 주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나라가 어떻게 처벌했는지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관아 앞에 서 있던 사람들
아전(衙前)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일하던 건물에서 나왔습니다. 관아 앞쪽에 자리한 이청(吏廳), 곧 작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죠. 원래 명칭은 향리(鄕吏)였고, 조선 후기로 가면 아전이나 인리로 통칭됐습니다.
이들의 뿌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지방 호족입니다. 고려가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호족을 향리로 편입했고, 조선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향리를 세습 실무자 계층으로 굳혔습니다. 조선 아전은 한 고을에 대대로 살면서 향역(鄕役)을 물려받았습니다.
여기에 수령 제도가 겹칩니다. 조선의 수령은 상피제에 따라 자기 고향에 부임할 수 없었고, 대개 가족 없이 혼자 내려왔습니다. 임기는 세종 5년 이후 60개월, 곧 5년으로 정해졌죠. 낯선 고을에 5년, 그것도 혼자. 반면 아전은 그 고을에서 나고 자라 대를 이어 같은 장부를 만졌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고을 살림을 아는 쪽은 늘 아전이었습니다. 세금 장부, 호구 문서, 소송 기록, 창고 관리까지 실무가 이들 손을 거쳤고요. 백성 입장에서 관청은 수령의 얼굴이 아니라 조선 아전의 얼굴이었습니다.
녹봉 명단에 없던 이름
고려에서는 향리에게 토지를 주었습니다. 외역전이라 불린 이 토지는 향직이 세습되니 사실상 함께 세습됐고요. 조선에 들어와서도 처음에는 인리위전(읍리전)이라는 이름으로 5결의 토지가 지급됐습니다.
그런데 1445년, 세종 27년에 인리위전 지급이 중지됩니다. 조선 전기의 국가는 향리 세력을 규제하기 위해 외역전을 혁파하고 녹봉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경국대전』이 정한 녹봉 18과 어디에도 아전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지방 관아의 유지·운영비까지 이들이 떠안았고요.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아전은 국가의 공식 녹봉 지급 대상에서 원칙적으로 제외된 신역(身役) 담당자였습니다. 조선 후기 연구에서는 지방 관아 차원에서 이방·호장 같은 상급 아전에게 월별 급여와 업무 처리비가 책정된 사례가 확인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것은 고을이 알아서 마련한 몫이었지, 나라가 보장한 급여는 아니었습니다.
받을 곳이 없으면, 걷는 자리에서 채운다
더 중요한 건 무보수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라가 그 상태를 알면서도, 세금을 걷고 장부를 적고 창고를 여는 권한은 그대로 맡겼다는 점입니다. 받을 곳이 없는 사람에게, 걷는 자리를 준 것이죠.
결과는 예정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부역을 고르지 않게 매기고, 세금을 걷으며 얹고, 문서를 쥔 힘으로 백성을 부렸습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이 수령 스스로를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적었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손대기 어려운 문제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하층 아전은 사정이 더 나빴습니다. 처우는 열악해지고 업무는 무거워져 향역을 버리고 도망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향역을 합법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경국대전』은 문과·무과·생원진사시에 합격하거나, 군공을 세워 사패를 받거나, 삼정일자가 잡과에 합격한 경우 자손의 향역을 면제해 주었죠. 다만 그 문은 매우 좁았습니다.
원악향리 — 나라가 내린 처벌
나라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1423년 간리추핵지법이 만들어졌고, 1429년 세종 11년 12월에는 백성을 침해한 향리를 처벌하는 조항이 정비됐습니다. 이것이 다듬어져 『경국대전』 「형전」의 원악향리(元惡鄕吏)조가 됩니다.
원악향리조는 처벌 대상을 10가지 유형으로 규정했습니다. 수령을 조종해 권세를 부린 자, 뇌물을 받고 부역을 고르지 않게 매긴 자, 세금을 횡령한 자, 양민을 불법으로 부린 자, 마을을 휘저으며 사욕을 채운 자 등이죠. 조선 아전이 저지를 수 있는 부정을 조목조목 적어 둔 셈입니다.
처벌은 곤장이나 유배가 아니었습니다. 원악향리로 판정되면 후미지고 피폐한 역, 곧 잔역(殘驛)의 역리로 영구히 귀속시켰습니다. 역리 역시 대물림되는 신역이었으니, 한 사람의 잘못이 그 집안의 자리를 통째로 끌어내리는 처벌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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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평 해설

연출장치 1 — 목에 걸린 사원증. 아전의 관복 깃 위에 현대식 목걸이형 사원증이 얹혀 있습니다. 소속을 증명하는 물건이지만, 소속이 생계를 보장한다는 뜻은 아니죠. 그 사원증에는 이름 대신 소속만 적혀 있습니다.
연출장치 2 — 빈 녹패 걸이. 화면 뒤편 벽에는 관원들의 녹패가 나란히 걸려 있고, 그 끝에 못만 남은 빈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아전이 서 있는 위치가 정확히 그 빈자리 아래입니다. 없는 것을 그리는 대신, 없는 자리를 그렸습니다.
현대의 자리
닮은 것 — 권한과 몫이 분리된 자리
조선은 아전에게 징수와 문서라는 강한 권한을 주면서, 그에 상응하는 몫은 제도 밖에 두었습니다. 권한과 보상이 분리되면 그 간극은 결국 아래에서 메워집니다. 이 구조가 조선 아전과 오늘의 중간 자리를 묘하게 닮게 만듭니다. 실적 압박은 위에서 내려오고 보상 권한은 없는 자리, 성과로만 평가받으며 아래를 조여야 하는 자리 말입니다.
다른 것 — 수단만 바뀌었다
두 시대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아전은 제도적으로 녹봉 대상이 아니었지만, 오늘의 중간 관리자는 임금을 받습니다. 조선에서는 수취 관행이 빈자리를 메웠고, 지금은 실적과 평가가 그 자리를 메우죠. 남은 것은 구조뿐이고, 수단만 바뀌었습니다.
구조는 설명이지, 면죄부가 아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구조가 어떤 행동을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당해지지는 않습니다. 조선도 그렇게 보지 않았기에 원악향리조를 만들어 처벌했고요. 다만 처벌만으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몫이 돌아가지 않는 한, 다음 사람이 같은 자리에 다시 섰기 때문입니다.
퀴즈 정답: 3번 — 한 섬도 없었습니다.
『경국대전』 녹봉 규정에 아전의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고려의 외역전에 이어 조선의 인리위전마저 1445년 세종 27년에 중지되면서, 국가가 보장하는 몫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세금을 걷는 권한은 그대로 남았죠.
심화 퀴즈. 『경국대전』 「형전」은 백성을 침해한 아전을 원악향리로 규정했습니다. 판정을 받으면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① 곤장 100대를 맞고 향역에서 풀려남
② 후미지고 피폐한 역의 역리로 영구히 귀속
③ 재산을 몰수당하고 관아의 노비가 됨
지난 편(제6편) 심화퀴즈 정답
문제: 조선에서 소송에 이긴 사람은 판결문을 받기 위해 관청에 무언가를 내야 했습니다. 돈도 쌀도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정답: 작지(作紙) — 종이(백지) 또는 포목. 소송물 가격에 따라 액수가 정해졌고, 아무리 비싼 소송이라도 백지 20권을 넘지 못했습니다.
다음 편 예고 — 평행이론 제8편
다음 편, 퇴근 시간 이야기입니다. 집에 가지 못하는 밤이 제도로 정해져 있었다면, 그 밤은 근무였을까요 아니면 생활이었을까요.
권한만 주고 몫을 비워 둔 자리는, 그 빈자리를 반드시 어딘가에서 채웁니다. 조선은 그 청구서를 백성에게 보냈고요. 조선 아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여러분을 가장 지치게 한 사람은, 어느 자리에 있었습니까?
평행이론 이전 편
· 평행이론 제6편 — 조선 가사 매매, 같은 집이 두 번 팔렸다
· 평행이론 제2편 — 고려 납속보관제, 관직에 가격표가 있었다
📚 참고 사료
· 『경국대전』 「형전」 원악향리(元惡鄕吏)조 — 10개 유형과 잔역 역리 영속
· 『경국대전』 「이전」 향리조 — 향역 면제 조건
· 『세종실록』 권46, 세종 11년 12월 1일 계유 — 백성을 침해한 향리 처벌
· 『목민심서』 「이전」 속리(束吏)조 — 아전 단속의 근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리(鄕吏)」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향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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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화퀴즈 정답 보기 (클릭)
심화퀴즈 정답: ②번, 후미지고 피폐한 역의 역리로 영구히 귀속
『경국대전』 「형전」 원악향리조는 처벌 대상을 10가지 유형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해당하는 향리를 잔역(殘驛)의 역리로 영속시키도록 했습니다. 매를 때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역 자체를 더 낮고 고된 자리로 옮겨 버린 것이죠.
역리 또한 대물림되는 신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처벌은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고 그 집안이 서 있던 자리를 통째로 끌어내렸습니다. 조선 아전을 붙잡아 둔 것은 녹봉이 아니라, 벗어나면 더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받은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