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조선신궁, 꼭대기 사당이 쫓겨난 이유

남산 조선신궁은 1925년 일제가 서울 남산 중턱에 세운, 조선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입니다.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신 곳이었죠.

남산 팔각정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꼭대기에는 원래 나라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 국사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산 조선신궁이 들어서던 해, 이 사당은 산을 떠나 인왕산으로 옮겨 가야 했습니다.

저렇게 큰 신궁을 지어 놓고, 왜 꼭대기의 작은 사당까지 치워야 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고 나면 남산의 위아래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신궁 자리에 지금 누가 서 있는지 알면, 한 번 더 놀라게 됩니다.

이제 글 맨 위의 오늘의 한 컷을 보세요. 제복 소매의 두 손이 남산 꼭대기의 작은 사당을 번쩍 들어 산 밖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 아래 중턱에는 몇 배나 큰 도리이와 신궁이 버티고 있습니다. 손의 주인은 “자리 좀 비켜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 대표 만평 「1925년 · 서울 남산」은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사당을 손으로 들어 옮기는 장면은 만평적 과장이며, 실제로는 건물을 해체해 인왕산으로 옮긴 뒤 다시 지었습니다.

30초 퀴즈: 꼭대기 사당은 왜 쫓겨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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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25년, 일제는 왜 남산 꼭대기의 이 사당을 산 밖으로 옮기게 했을까요?

①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② 신궁 가는 길을 막고 있어서

③ 무속을 미신이라 금지해서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①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그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했습니다.

②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국사당은 꼭대기에, 신궁은 그 아래 기슭에 있었습니다. 신궁으로 오르는 길이 꼭대기를 지날 일이 없었습니다.

③도 그럴듯하지만 맞지 않습니다. 금지가 목적이었다면 허물고 끝냈을 것입니다. 국사당은 인왕산에 옮겨 다시 지어졌고, 지금도 굿이 열리는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림을 다시 보세요. 사당을 들어 올리는 손이 말한 ‘자리’는 그냥 땅이 아니라 ‘더 높은 자리’였습니다.

남산 꼭대기의 수호신, 국사당

남산의 옛 이름은 목멱산입니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이 산을 ‘목멱대왕’으로 받들고, 꼭대기에 나라의 제사를 올리는 사당을 세웠습니다. 목멱신사, 곧 국사당입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어서 벼슬아치도 일반 백성도 이곳에서 함부로 제사를 지낼 수 없었습니다.

경복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정면에 남산이 보입니다. 궁궐과 마주 선 산, 그 꼭대기는 도성을 지키는 신의 자리였습니다. 지금 남산 팔각정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국사당 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산 조선신궁, 15년의 준비

남산 조선신궁은 하루아침에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준비는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서울시 정비사업 연표를 보면 1918년 부지를 정해 공사에 착수했고, 1920년 기공식을 거쳐 1925년에 완공됐습니다.

자리는 당시 일본인들이 조성한 한양공원, 지금의 백범광장과 남산도서관 일대였습니다. 한양공원 조성과 신궁 건립 과정에서 산의 지형이 크게 깎이고 메워졌고, 한양도성 성벽 777m가 헐렸습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이 한 지역에서 헐린 규모로는 이곳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신궁’은 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격이 높은 곳에 붙는 이름입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시설을 조선인을 ‘동화’해 일본의 통치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국사당이 쫓겨난 이유: ‘높이’

신궁을 지은 곳은 남산 꼭대기가 아니라 중턱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위였습니다. 남산 조선신궁보다 더 높은 꼭대기에 조선의 수호신 사당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국사당의 이전을 강요했습니다. 1925년, 국사당은 남산을 떠나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인왕산을 고른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의 나라 수도의 산에서도, 자기네 신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했던 셈입니다. 신에게까지 위아래를 매긴 것, 이것이 이번 만평의 핵심입니다.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

국사당의 원래 자리를 2002년의 한 신문 기사는 ‘남산 식물원 자리’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여러 기사는 남산 꼭대기, 지금의 팔각정 자리로 봅니다. 이 글은 ‘남산 꼭대기’로 썼습니다. 또 국사당 건물은 해체해 옮긴 뒤 원래 모습대로 다시 지은 것으로, 양 끝 두 칸은 이전한 뒤 새로 붙였다고 합니다.

1930년대, 남산으로 불려 간 사람들

흔히 신궁이 세워진 날부터 모든 조선인이 끌려가 절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1920년대에는 조선 안의 모든 사람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30년대입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무렵, 일제는 전쟁을 위해 후방을 동원하면서 조선의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남산 조선신궁은 참배 강요로 조선인을 남산에 불러들였고, 조선인이 어떤 태도로 절하는지까지 일본인들의 평가 대상이 됐습니다.

해방 다음 날, 신을 올려보낸 신궁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튿날, 일본은 서둘러 신궁의 신령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 승신식을 치렀습니다. 예배 대상물은 일본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불태웠으며, 미군 진주가 다가오자 신궁 건물을 스스로 해체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훗날 우리 손으로 헐었지만, 남산 조선신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세운 이들이 질서정연하게 거둬 갔습니다. 신궁은 사라졌어도 그 터는 남았고, 땅속에는 흔적이 묻혔습니다.

그 자리에 선 사람

2013~2014년 서울시의 발굴조사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남산 조선신궁 배전 터가 드러났습니다. 가로 18.6m, 세로 14.8m 크기입니다. 배전은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절을 하던 건물입니다. 지금은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안에서 발굴된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궁 터 바로 그 일대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서 있습니다. 1970년에 처음 문을 열었고, 2010년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었습니다. 열두 개의 유리 기둥은 단지동맹을 맺은 열두 사람을 상징합니다.

2010년 새 기념관을 지을 때 서울시는 안 의사 동상도 새로 만들어 기념관 입구 쪽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당시 서울시 담당 과장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의 동상이 식민통치의 상징이던 조선신궁 자리에 서는 것이 의미가 크다고 밝혔습니다.

메이지 천황을 모시던 자리에, 메이지 정부에서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람이 서 있는 것입니다. 덧붙이면,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신처럼 모시는 절 박문사를 1931년 장충단공원(지금의 신라호텔 부지)에 따로 세웠습니다. 이토는 그 절에, 메이지는 이 신궁에 모셔졌던 셈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과 그를 존경한 일본인 간수 이야기는 만평한국사 「사형수를 적국 간수가 존경한 이유」에서 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만평 읽기: 사실과 상징

그림 속 요소 구분 근거와 뜻
꼭대기의 국사당, 중턱의 신궁 사실 국사당은 정상, 조선신궁은 그 아래 기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당을 들어 옮기는 두 손 상징·과장 1925년 이전 강요를 동작 하나로 압축. 실제로는 해체 후 인왕산에 다시 지음
‘총독부’ 꼬리표의 소매 상징 식민 권력을 손으로만 표현. 특정 인물을 가리키지 않음
신궁과 사당의 크기 차이 과장 큰 쪽이 작은 쪽의 ‘위치’를 탐내는 역설을 보이려는 만평적 과장
“자리 좀 비켜 주시오” 창작 문구 사료 인용이 아닌 만평 말풍선. 정답 뒤에는 ‘높은 자리’로 다시 읽힘
산 아래 흰옷의 세 사람 상징 자기 산의 신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1925년 강제 참배를 뜻하지 않음

처음에는 공손한 부탁처럼 들리던 말풍선이, 정답을 알고 나면 다르게 들립니다. 비켜 달라던 것은 땅이 아니라 높이였고, 꼭대기에 남은 빈 기단이 그 대가였습니다.

남산 조선신궁 건립으로 쫓겨난 국사당이 인왕산 선바위 아래 홀로 앉아 있고, 멀리 남산 꼭대기에 빈 기단만 남은 AI 생성 만평
「지금 · 서울 인왕산」 — AI 생성 이미지. 국사당과 먼 남산 사이의 빈 거리는 만평적 표현입니다.
남산 조선신궁 터에 선 열두 기둥의 안중근 기념관과 옛 신궁의 점선 윤곽, 꼭대기의 빈 국사당 터를 그린 AI 생성 만평 정답 컷
「지금 · 서울 남산」 정답 컷 — AI 생성 이미지. 옛 신궁을 점선으로 겹친 장면은 만평적 표현입니다.

오늘의 질문: 우리가 오르는 그 계단

남산에는 드라마 촬영지로 이름난 계단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삼순이 계단’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그 계단을 다 오르면 바로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의 남산 조선신궁 터가 나옵니다. 사진을 찍으며 오르던 그 계단 끝에, 사람들이 절을 하던 배전의 기초가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배전 터 앞에서는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관람 데크에 서서 내려다보고, 해설을 듣고, 그 시절을 배웁니다. 절하던 자리가 배우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꼭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가 “비켜 달라”던 그 높은 자리, 옛 국사당 터에는 지금 팔각정이 서 있습니다. 누구나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는 곳입니다. 다만 그 자리의 주인이던 국사당은 백 년이 넘은 지금도 인왕산에 있습니다. 국사당을 남산으로 되돌리자는 서명운동이 열리기도 했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남산에 오르면 한 번쯤 위아래를 올려다보세요. 꼭대기와 중턱, 그 사이의 높이가 한때 누가 위에 서느냐의 문제였다는 걸 알고 나면, 같은 풍경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남산은 어떤 곳인가요?

심화 퀴즈

Q. 1945년 해방 직후, 남산 조선신궁을 헐어 없앤 것은 누구였을까요?

① 일본 측이 의식을 치르고 스스로 해체

② 서울 시민들이 몰려가 불태움

③ 미군정이 들어와 철거 명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① 일본 측이 의식을 치르고 스스로 해체입니다. 일본은 광복 직후 신령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을 치르고, 예배 대상물은 일본으로 보낸 뒤 나머지를 불태웠고, 미군 진주가 다가오자 신궁을 스스로 해체했습니다.

②를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해방 뒤 다른 지역의 신사들은 우리 손으로 부서진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산 조선신궁만은 일본인들이 직접 거둬 갔습니다. 해체에 나선 것은 미군정이 아니라 신궁을 세운 일본 측이었으므로 ③도 맞지 않습니다.

출처와 확인 메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왕산 국사당」 — 국사당의 원래 위치, 1925년 이전과 그 이유, 인왕산을 택한 사연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2)
  • 국가기록원 「신사 총설」 — 조선신궁의 준비(1911)와 완성(1925), 사격, 위치, 해방 직후 철거, 박문사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2)
  • 서울시 문화누리집 「묻혔던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100년 만에 모습 드러내」 — 조선신궁 연표(1918·1920·1925), 한양도성 777m 훼철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2)
  • 서울시 문화누리집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개방」 — 2013~2014 발굴, 배전 터 규모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2)
  • 서울시 문화누리집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 배전의 뜻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2)
  • 내 손안에 서울 「잊어선 안 될 역사 ‘국치의 길’」, 2017.9.27 — 국사당 강제 이전, 아마테라스·메이지 신위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내 손안에 서울 「어두웠던 역사를 간직한 ‘국치(國恥)길’」, 2021.3.3 — 삼순이 계단과 신궁 터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내 손안에 서울 「옛 조선신궁 자리, 남산에 세워진 기림비」, 2019.8.16 — 광복 후 일본의 신궁 해체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서울신문 [노주석의 서울살이] 「남산 ‘조선신궁 터’에 대한 상념」, 2017.6.24 — 배전 터, 일본 스스로의 철거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서울신문 「안중근 동상 ‘안의사 기념관’에 재건」, 2010.6.16 — 동상 이전과 서울시의 취지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한국관광공사 「안중근의사기념관」·「인왕산국사당」 — 1970 개관·2010 신축, 국사당의 성격과 이전 복원 · 자료 보기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2)
  • 경향신문 「남산 성곽길의 세가지 성돌」, 2021.2.11 — 팔각정 = 국사당 자리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안종철, 「종교와 국가의례 사이: 1920-30년대 일본신도를 둘러싼 조선 내 갈등과 서구인들의 인식」 — 1920년대와 1930년대 신사참배 강요의 차이 · 논문 보기 (확인 2026-10-12)
  • 비온티노 유리안, 『일제하 서울 남산 지역의 일본 신도·불교 시설 운영과 의례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16 — 참배 강요와 참배 태도 평가 · 논문 보기 (확인 2026-10-12)
  • 시대 「남산 조선신궁」, 2017.8.22 — 다른 지역 신사와 남산 신궁의 해체 차이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 아주경제 「남산은 쉬고 싶다」, 2016.11.30 — 국사당 제자리 찾기 서명운동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2)

국사당 이전 이유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따랐으며, 1925년 당시 신문 원문 대조를 진행 중입니다. 일부 자료에는 조선신궁을 ‘1918년에 지었다’고 적혀 있으나, 서울시 연표에 따라 1918년은 부지 선정·착수, 완공은 1925년으로 썼습니다. 신궁 계단 수, 연간 참배객 수, 해체 작업의 구체 날짜는 자료마다 다르거나 원출전을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이 글의 만평 이미지는 모두 AI로 생성한 창작물이며 실제 당시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