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이름 유래는 한 번의 폭탄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1927년 10월 18일 대구.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벌꿀’이라며 배달된 상자가 터졌습니다.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만든 폭탄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대구의 청년들을 줄줄이 잡아들였고, 그 가운데 스물 몇 살의 청년 이원록이 있었습니다.
대구형무소에서 그에게 붙은 번호는 264. 우리는 이 번호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광야」와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번호에는 이름의 유래보다 더 씁쓸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는 왜 1년 7개월 만에 풀려났을까요?
오늘의 한컷만평퀴즈
1927년 은행 폭탄 사건으로 갇힌 청년 이원록. 그가 1년 7개월 만에 풀려난 까닭은?
① 정해진 형기를 다 채워서
② 모범수로 감형을 받아서
③ 진짜 폭탄범이 붙잡혀서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진짜 폭탄범이 붙잡혀서
폭탄을 만든 장진홍은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붙잡혔습니다.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1929년 집행원부에 따르면 이원록은 그 뒤인 1929년 5월 4일 혐의를 벗고 풀려났습니다. 진범이 잡히고도 석 달 가까이 더 갇혀 있었던 셈입니다.
①과 ②가 틀린 이유도 분명합니다. 그는 재판이 끝나지 않은 미결 상태였기 때문에, 채울 ‘형기’도 줄일 ‘형’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평 속 간수의 말 “이름은 필요 없다”는 두 번 다시 읽힙니다. 하나, 그들에게는 폭탄을 던진 사람의 이름조차 필요 없었다. 둘, 이름을 지우려고 찍은 그 번호가 훗날 그의 이름이 되었다. 이·육·사.

벌꿀 상자 폭탄과 엉뚱하게 끌려간 형제들
장진홍은 폭탄을 나무 상자에 담아 꿀 선물처럼 꾸민 뒤, 묵던 여관의 사환에게 배달을 맡겼습니다. 상자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안에서 터졌고, 은행원과 경찰 등이 다쳤습니다. 장진홍은 현장을 빠져나가 몸을 숨겼습니다.
범인을 찾지 못한 일제 경찰의 눈은 대구에서 민족운동을 하던 청년들에게 향했습니다. 안동 출신으로 대구에 살던 이원록도 형제들과 함께 붙잡혔습니다. 국가기록원 집행원부에는 그가 134번, 동생 이원일이 135번으로 나란히 적혀 있고, 죄명 칸에는 폭발물 관련 규칙과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미수 등이 이어집니다. 그가 던지지 않은 폭탄의 죄목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1년 7개월을 보냈습니다. 등에 찍힌 것은 이름이 아니라 번호였습니다.
이육사 이름 유래: 풀려난 청년은 그 번호를 어떻게 했을까
억울하게 받은 번호라면, 보통은 잊고 싶을 겁니다. 출옥한 이원록은 대구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번호를 두고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심화 퀴즈
출옥 이듬해인 1930년, 그는 잡지에 평론을 실으며 이름 ‘이활’ 곁에 무엇을 함께 적었을까요?
① 본관을 딴 ‘진성인’
② 고향을 딴 ‘원촌 선비’
③ ‘대구 二六四’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대구 二六四(대구 이육사)’
역사학자 김희곤은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푸른역사, 2024)에서, 그가 1930년 10월 잡지 『별건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을 발표하며 ‘이활(李活)’과 ‘대구 이육사(大邱 二六四)’를 함께 썼다고 짚었습니다. 감옥이 붙인 숫자를, 지명까지 붙여 자기 이름처럼 내건 것입니다.
이후 그는 소리가 같은 여러 한자로 ‘육사’를 쓰다가 1935년 이후에는 주로 ‘陸史’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자마다 담긴 뜻을 두고는 여러 설이 있어, 이 글에서는 어느 하나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불리는 번호, 서명하는 이름
누구에게나 평생 잊히지 않는 번호가 하나쯤 있습니다. 제대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입에서 바로 나오는 군번, 시험장 책상에 붙어 있던 수험번호. 기관이 붙여 준 번호는 그렇게 몸에 남습니다.
다만 우리는 대개 그 번호로 불렸습니다. 이육사는 그 번호로 서명했습니다. 남이 붙인 꼬리표를 숨기지 않고, 제 손으로 들어 올린 것. 이 작은 차이가 그의 이름을 ‘피해의 기록’에서 ‘선택의 기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이육사 이름 유래가 단순한 숫자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비슷한 장면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1874년 비평가 루이 르루아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꼬며 쓴 말이었지만, 화가들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조롱하려고 붙인 말이 한 시대의 깃발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지금 시가 되었습니다. 대구문학관은 2026년 공모전에서 이육사의 수인번호 264와 광복절 815를 따서, 264자 이내의 시와 815자 이내의 에세이를 모집했습니다. 사람을 지우려고 붙인 번호가 100년 뒤 시의 글자 수가 된 셈입니다.
그 뒤의 삶
이육사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붙잡혔습니다. 흔히 열일곱 번 옥고를 치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군사 교육을 받았고, 기자이자 시인으로 글을 썼습니다.
1943년 어머니와 형의 소상에 참석하러 귀국했다가 다시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고, 1944년 1월 16일 베이징의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해방을 1년 반 남짓 앞둔 겨울이었습니다. 「광야」와 「청포도」는 그가 남긴 이름 ‘이육사’와 함께 오늘까지 읽힙니다.
만평 속 사실과 상징
| 구분 | 내용 |
|---|---|
| 사실 | 1927년 장진홍 의거 연루와 투옥, 1929년 진범 체포 뒤 5월 4일 석방(국가기록원 집행원부), 1930년 ‘대구 二六四’ 서명(김희곤 2024), 1944년 베이징 순국 |
| 공식 설명 | 이육사 이름 유래는 수인번호 264(문학관·대구근대역사관 설명). 형무소 수형기록 원본은 공개 확인되지 않음 |
| 창작 상징 | 등에 도장으로 번호를 찍는 장면, 무릎 위 붓, 벽의 날짜 금, 벽에 걸린 264 천 조각 |
| 만평적 과장 | 말풍선 “이름은 필요 없다”, “착오였다”는 실제 발언이 아닌 창작 문구. 감방에서 시를 썼다는 기록은 없음 |
출처와 확인 메모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기록 복원·공개」, 기록물 뉴스레터 vol.121(2017) — 1929년 집행원부, 석방일 1929.5.4
- 매일신문, 「’264′ 그리고 항일 투쟁의 의지」(2024.7.20) — 김희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 소개, 1930년 『별건곤』 서명
- 경북매일, 대구근대역사관 특별기획전 「백마 타고 온 초인, 대구 이육사」(2025.4.2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육사’ 항목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인문학 위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 1927.10.18 의거, 1929년 2월 장진홍 오사카 체포
- 뉴시스, 의열단 100주년 ‘이육사'(2019.10.6) — 1943년 체포, 1944.1.16 순국
- 경북매일, 「2026 대구문학관 문학 공모전」(2026.7.15) — 264자 시·815자 에세이 공모
- 확인 메모: 수감 기간은 자료마다 ‘1년 7개월’, ‘2년 4개월’, ‘3년’으로 갈리나, 국가기록원 석방일과 맞는 1년 7개월을 따랐습니다. 함께 붙잡힌 형제 수와 순국 당시 나이는 자료마다 달라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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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만평 이미지는 AI로 생성했으며, 인물의 얼굴을 재현하지 않고 사실을 압축한 상징으로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