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사건, 빼앗긴 사전 원고를 지킨 뜻밖의 상자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가 빼앗아 간 『조선말 큰사전』 원고,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알고 계셨나요? 1942년 일제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던 학자들을 잡아 가두고, 13년 동안 모은 원고를 ‘증거물’로 압수했습니다. 영화 「말모이」로 많은 분이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해방되고 3주쯤 지난 1945년 9월, 그 원고가 서울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의 한 상자 안에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압수된 곳은 함경남도 함흥이었는데, 원고는 왜 서울 기차역 창고에 와 있었을까요?

이 글의 한 줄

일제가 학자들을 처벌하려고 빼앗은 사전 원고가, 바로 그 처벌 절차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빼앗으려고 챙긴 증거물이 오히려 우리말을 지켜 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이런 역설이 왜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지 함께 보시죠.

이제 글 맨 위의 오늘의 한 컷을 보세요. 해방 직후의 텅 빈 기차역 창고, 빛줄기 아래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상자 앞면에는 감옥처럼 쇠창살이 박혀 있는데, 그 안에는 한글 원고지가 하얗게, 흐트러짐 없이 쌓여 있습니다. 역무원의 손이 상자에 달린 꼬리표를 막 뒤집으려 하며 중얼거립니다. “주인 없는 상자인가?” 꼬리표 뒷면은 아직 비어 있습니다.

※ 대표 만평 「1945년 9월 · 경성역 창고」는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쇠창살 달린 상자는 ‘증거물로 갇힌 원고’를 표현한 만평적 상징이며, 실제 상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말풍선은 사료 인용이 아닌 창작 문구입니다.

30초 퀴즈: 상자는 왜 서울에 있었나

영상에서 보기가 나오면 잠시 멈추고 먼저 답을 골라 보세요.

Q. 함흥에서 압수된 사전 원고, 왜 서울 경성역 창고에 있었을까요?

① 일본 본토로 실어 가려고

② 학자들이 판결에 불복해서

③ 총독부가 불태워 없애려고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학자들이 판결에 불복해서입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받은 네 학자는 감옥에서도 끝까지 재판에 맞섰습니다.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울의 경성고등법원(지금의 대법원에 해당)에 다시 재판을 청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재판의 증거물인 사전 원고도 서울 법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원고가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③을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일제가 빼앗아 없앴다”는 것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결말이니까요. 하지만 원고는 증거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①은 ‘기차역’이라는 단서를 일본행으로 읽은 오답입니다. 상자가 향하던 곳은 일본이 아니라 서울의 법원이었습니다.

그림을 다시 보세요. 감옥처럼 보이던 쇠창살 상자는, 학자들이 끝까지 재판에 맞선 덕분에 서울까지 실려 온 상자였습니다. 서울 법원은 1945년 8월 13일 학자들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 해방이 됐습니다. 원고를 받아야 할 일제 법원이 없어지자, 상자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채 창고에 남아 있었습니다. 빼앗으려고 챙긴 증거물이, 오히려 우리말을 지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역무원의 “주인 없는 상자인가?”라는 혼잣말은 사실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받기로 했던 주인, 일제의 법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니까요.

13년 동안 모은 원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자는 움직임은 나라를 잃은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1911년 주시경 선생 등이 ‘말모이’를 짓기 시작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29년 한글날, 교육자·학자·언론인·종교인 등 108명이 뜻을 모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었습니다. 국가기록원 해설에 따르면 이들은 사전 편찬을 민족이 다시 살아나는 지름길로 여겼습니다.

사전을 만들려면 먼저 표기법과 표준어가 정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쓰는 맞춤법의 뿌리가 바로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낱말 모으기는 몇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각지의 회원과 학생, 지역 주민까지 사투리와 일상어를 모아 보냈습니다. 1942년 봄에는 원고 일부가 인쇄소로 넘어갔고, 여름에는 200여 쪽이 조판되어 교정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전이 세상에 나오기 직전이었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사전이 ‘증거물’이 되다

바로 그 무렵인 1942년 9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가 사전편찬원 정태진을 잡아갔습니다. 이어 10월부터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이윤재·한징 등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잇달아 검거됐습니다. 사전을 만드는 일이 ‘치안유지법 위반’, 곧 독립운동으로 몰린 것입니다. 역사는 이 일을 ‘조선어학회 사건’이라 부릅니다.

일제 법원은 우리말을 모으고 다듬는 일 자체를 민족정신을 지키는 운동으로 보고 죄를 물었습니다. 말을 정리하는 일이 나라를 되찾는 일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학자들보다 오히려 일제가 더 두려워했던 셈입니다.

검거와 신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사전 편찬을 이끌던 이윤재와 한징은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함흥의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13년 동안 모은 원고지 2만6천5백여 장은 이때 증거물로 압수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습니다.

끝까지 불복한 네 사람

조선어학회 사건 재판은 1945년 1월까지 함흥지방법원에서 아홉 차례 열렸습니다. 국가기록원 해설에 따르면 재판에 넘겨진 12명 가운데 8명은 집행유예·무죄·상고 포기 등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네 사람은 징역형을 받아 감옥에 남았습니다.

네 사람은 판결에 불복해 서울의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싸움이었지만, 사전 편찬이 죄라는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상고 때문에 재판 기록과 함께 증거물인 사전 원고도 함흥을 떠나 서울로 보내졌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상고가 기각된 1945년 8월 13일, 판사 소매의 손이 서류에 주홍색 '기각' 도장을 찍고 벽의 일력이 13일에서 15일로 넘어가려는 AI 생성 만평
「1945년 8월 13일 · 기각」 — AI 생성 이미지. 도장과 일력은 ‘기각 이틀 뒤 해방’을 압축한 만평적 표현이며, 실제 판결 장면이 아닙니다.

1945년 8월 13일, 경성고등법원은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형이 확정되어 네 사람은 계속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틀 뒤, 8월 15일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네 사람은 8월 17일 함흥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이 이틀 사이에 원고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재판 증거물로 서울에 와 있던 원고는, 해방으로 일제 법원이 없어지면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짐이 되어 창고에 남았습니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창고

해방과 함께 풀려난 조선어학회 사건 당사자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전 원고였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홍원경찰서와 함흥지방법원에 넘어간 것까지만 알 수 있었고, 그 뒤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0년 넘는 공이 물거품이 됐다고 모두가 낙심했습니다.

그러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화물 창고에서 원고가 발견됐습니다. 국어학자 최경봉의 『우리말의 탄생』은 이 장면을 이렇게 그립니다. 일본이 물러간 뒤 갈 곳 잃은 화물이 쌓인 창고에서, 짐을 점검하던 역장이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얼마 전 원고를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발견된 1945년 9월 경성역 창고, 쇠창살 상자의 주홍 꼬리표가 뒤집혀 '증거물 · 고등법원 행' 글자가 드러난 AI 생성 만평 정답 컷
「1945년 9월 · 경성역 창고」 정답 컷 — AI 생성 이미지. 꼬리표의 문구와 상자의 모양은 만평적 상징이며, 실제 꼬리표 문구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되찾은 원고는 다시 손질을 거쳐, 1947년 한글날 『조선말 큰사전』 첫 권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뒤로도 시련은 계속됐습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편찬원들은 아직 내지 못한 원고를 한 달 동안 베껴 쓴 뒤, 베낀 것은 최현배의 집에, 원본은 충남 천안 류제한의 고향 집 땅속에 묻었습니다. 한 번은 일제의 상자가, 한 번은 땅이 원고를 지킨 셈입니다.

마침내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마지막 6권이 나오며 『큰사전』이 완간됐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3,558쪽에 16만4천여 개의 올림말을 담은 우리 손으로 만든 첫 대사전이었습니다. 1929년 편찬회를 만든 지 28년 만의 일입니다.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

원고 발견일을 ‘1945년 8월 13일’로 적은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은 9월 8일로 명시하며, 8월 13일은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한 날입니다. 두 날짜가 섞인 것으로 보여 이 글은 9월 8일로 썼습니다.

함흥 재판의 결과를 ’11인 징역’으로 적은 자료도 있습니다. 이는 실형과 집행유예를 합친 숫자로 보이며, 끝까지 감옥에 남아 상고한 사람은 네 명입니다.

발견 장면의 ‘역장’과 ‘수취인이 고등법원인 상자’는 연구서의 서술이며, 상자의 실제 모양이나 꼬리표 문구를 전하는 사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만평 읽기: 사실과 상징

그림 속 요소 구분 근거와 뜻
경성역 창고의 상자 속 원고 사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국가기록원)
상자 앞면의 쇠창살 상징 증거물로 ‘갇힌’ 원고. 감옥처럼 보이던 상자가 금고 노릇을 했다는 역설
손에 비해 거대한 상자 과장 원고 2만6천5백여 장, 13년의 무게를 보여주려는 만평적 과장
찢어진 봉인띠와 자물쇠 상징 압수와 봉인. 해방으로 그 봉인의 힘이 사라졌다는 뜻
주홍 꼬리표 상징 고등법원으로 가던 증거물(국가기록원). 실제 꼬리표 문구는 전해지지 않음
역무원의 손 상징 발견한 사람. 연구서는 역장으로 서술. 얼굴은 그리지 않음
“주인 없는 상자인가?” 창작 문구 받을 주인인 일제 법원이 해방으로 사라진 상황을 담은 만평 말풍선
바닥에 흩어진 원고 두 장 상징 원고는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못한 두 사람, 이윤재와 한징

처음에는 역무원의 혼잣말처럼 들리던 “주인 없는 상자인가?”가, 정답을 알고 나면 다르게 들립니다. 이 상자를 받기로 한 것은 일제의 법원이었고, 원고를 쓴 것은 조선어학회였습니다. 해방으로 일제 법원이 사라지자 상자는 누구에게도 넘어가지 않았고, 덕분에 원고는 원래 주인인 학자들의 손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질문: 처벌의 서류가 하는 일

원고를 지킨 것은 학자들을 처벌하려고 만든 ‘증거물 상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설은 원고 한 묶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는 것도, 학자들을 처벌하려고 일제가 남긴 서류 덕분입니다. 이 사건을 연구한 책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탐구』는 함흥지방법원의 예심종결결정서와 겨우 살아남은 고등법원 판결문을 이 사건의 핵심이자 유일한 사료로 꼽습니다. 학자들을 감옥에 묶어 두려던 문서가, 지금은 그들이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기도는 2026년 2월, 그동안 이름이 묻혀 있던 독립운동 참여자 1,094명을 새로 찾아냈습니다. 이 가운데 648명은 판결문과 수형 기록 같은 객관적 증거가 분명해 국가보훈부에 포상을 신청했습니다. 후손이 없거나, 후손조차 조상의 활동을 몰라 잊혀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처벌하려고 일제가 꼼꼼히 남긴 판결문과 감옥 기록이, 80년이 지나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경성역 창고의 상자가 원고를 지킨 것과 같은 일이, 지금은 사람의 이름을 두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쓰는 맞춤법과 국어사전도 그 상자에서 나온 원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한경 생글생글은 『큰사전』이 1999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소개합니다. 한글을 만든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만평한국사 세종의 한글 편도 함께 읽어 보세요. 글자를 만든 사람과, 그 글자로 말을 모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무심코 사전에서 낱말 하나를 찾아보신다면, 그 말이 한때 증거물 상자 속에서 해방을 기다렸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심화 퀴즈

Q. 오늘날 기록이 거의 없는 독립운동가를 새로 찾아낼 때, 가장 핵심 증거로 쓰이는 자료는 무엇일까요?

① 후손의 증언

② 일제의 판결문과 수형 기록

③ 해방 뒤 신문 광고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일제의 판결문과 수형 기록입니다. 경기도는 2026년 2월 판결문·수형 기록 등 객관적 증거가 명확한 648명을 골라 국가보훈부에 포상을 신청했습니다. 2024년 순국선열의 날 포상 역시 국가보훈부가 재판 판결문과 수형 기록을 발굴하고 분석해 이뤄졌습니다.

①을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집안에 전해 오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니까요. 하지만 이번 발굴 대상에는 후손이 없거나, 후손이 조상의 독립운동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증언만으로는 공적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당시의 공식 기록이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③의 신문 기사도 보조 자료로 쓰이지만, 활동과 처벌을 직접 확인해 주는 것은 판결문과 수형 기록입니다.

처벌하려고 남긴 서류가 기리는 증거가 된다는 것.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경성역 창고의 상자가 보여준 역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지난 편 심화 퀴즈 다시 풀기 · 7편 광화문

Q. 1968년, 불타 버린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습니다. 이 문은 무엇에 줄을 맞춰 섰을까요?

① 경복궁 근정전

② 옛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

③ 경복궁 뒤 북악산 정상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은 ② 옛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입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68년의 광화문은 정확한 고증 없이 복원되어, 옛 총독부 건물과는 일직선이지만 근정전의 중심축과는 3.75도 어긋난 채 세워졌습니다.

①을 고르셨다면 그럴 만합니다. 궁궐의 정문이니 궁궐의 중심 건물에 맞췄으리라 생각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1968년의 문은 궁궐 쪽 어느 축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광화문은 2010년에야 제 방향을 되찾았습니다.

이야기 전체는 「광화문 철거를 막아선 손, 뜻밖의 주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출처와 확인 메모

  • 국가기록원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 「조선말 큰사전 편찬 원고」 해설(리의도) — 1929년 편찬회, 맞춤법·표준어, 1942년 검거, 이윤재·한징 옥사, 네 사람의 상고와 8.13 기각·8.17 석방, 9.8 경성역 창고 발견, 6·25 원고 은닉, 1957년 완간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6)
  • 국가기록원 소식지 「74년 세월 곳곳 훼손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 복원」, 2016.3 —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등록문화재 제524-2호, 총 17권, 압수와 1945.9.8 발견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6)
  • 문화체육관광부(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한글학자의 겨레사랑」, 2007.10.5 — 원고지 2만6천5백여 장, 상고 기각으로 증거물 운송 후 방치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6)
  • 주간경향 북리뷰 「우리말의 탄생」, 2015.10.12 —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의 발견 장면(역장, 수취인이 고등법원인 상자)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6)
  • 한글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 2020년 ‘조선말 큰사전 원고’ 14책 보물 지정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6)
  • 교보문고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탐구』 소개 — 예심종결결정서와 고등법원 판결문이 핵심 사료 · 자료 보기 (확인 2026-10-16)
  • 한국경제 생글생글, 2025.9 — 『큰사전』과 『표준국어대사전』의 관계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6)
  • 경향신문 「경기도, ‘잊힌 독립유공자’ 1094명 발굴」, 2026.2 — 판결문·수형 기록으로 648명 포상 신청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6)
  • 아주경제 「순국선열의날 독립유공자 포상」, 2024.11.14 — 판결문·수형 기록 발굴을 통한 포상 · 기사 보기 (확인 2026-10-16)

일제 법원이 사전 편찬에 죄를 물은 판결 이유는 자료마다 어느 법원의 문구인지가 다르게 소개되어, 이 글에서는 ‘일제 법원’으로만 적고 문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고등법원 판결문 원문과 1945년 10월 6일 매일신보 보도는 원문 대조를 진행 중입니다. 체포된 인원은 자료마다 숫자가 달라 적지 않았습니다. 이 글의 만평 이미지는 모두 AI로 생성한 창작물이며 실제 당시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한컷만평퀴즈는 한 컷의 만평과 한 문제로 역사 속 결정과 대가를 읽는 시리즈입니다. 다른 편도 함께 풀어 보세요.

· 1편 · 일장기 말소 사건 — 검열을 통과한 신문, 그 뒤의 결말

· 2편 · 서울 전차 소각 사건(1899) — 사과 대신 나온 조건

· 3편 · 고종 커피 독살 사건, 진짜 싸움은 법정이었다

· 4편 · 윤봉길 도시락 폭탄의 진실 — 실제로 던진 것은 물통

· 5편 · 창경원 동물원의 명분은? 궁궐에서 ‘궁’이 지워진 날

· 6편 · 남산 조선신궁, 꼭대기 사당이 쫓겨난 이유

· 7편 · 광화문 철거를 막아선 손, 뜻밖의 주인